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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정몽주의 '폐가입진'..피눈물로 옹립한 공양왕

4일 오후 KBS 1TV 대하사극 '정도전'(극본 정현민·연출 강병택 이재훈)에서는 정몽주(임호 분)가 우왕(박진우 분), 창왕 부자를 폐한 뒤 공양왕(남성진 분)을 옹립하는 장면이 방송됐다.


폐가입진(廢假立眞). 거짓된 것을 폐하고 진실된 것을 세운다는 뜻이다. 우왕이 공민왕의 적자가 아니라 요승 신돈의 아들이며, 자연히 우왕의 아들인 창왕도 왕(王)씨가 아닌 신(神)씨이므로 폐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역사 속에서 이 '폐가입진'의 논리를 들어 우왕과 창왕을 제거하는데 가담했던 인물 중 정몽주가 끼어있다는 사실은, 자못 충격적이다.

정몽주는 정도전(조재현 분)을 위시한 급진개혁파의 전제개혁 등에 일견 동의하면서도, 역성혁명의 대업에는 단호히 동참을 거부한다. 후일 이방원(안재모 분)의 심복들에게 살해당한 자리에서 대나무가 돋아났다는 야사가 전해질 정도로 대쪽같은 절개를 자랑하는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군주를 폐하고, 죄인으로 몰아 처형하는데 앞장서기까지 했다. 이 '폐가입진'이 드라마 '정도전'에서 과연 전체 내러티브와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될지에 시청자들의 관심과 걱정이 모아진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걱정은 기우였다.



정도전이 창왕으로 하여금 이성계에게 선위를 하도록 종용하겠다는 계획을 털어놓으며 협조를 요구하자 정몽주는 "내 평생 임금의 성씨는 오직 하나, 왕씨다"라며 진노한다. 이후 정몽주는 이성계(유동근 분)가 선위를 통한 역성혁명의 칼날을 뽑아들기 위해 흥국사에서 회합을 도모하자, 이 자리에 예고없이 나타난다. 도당의 중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성계와 독대를 청한 정몽주는, '폐가입진'이라는 카드를 꺼낸다. 신돈의 자손들을 몰아낸 뒤에, 왕씨 일가인 정창군 왕요(남성진 분)를 옹립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추후에도 왕씨가 아닌 인물은 대통을 이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몽주의 '폐가입진'은 유자(儒者)로서의 마지막 신념을 방어하기 위해 유자로서 목숨을 끊는 듯한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나름의 충절을 보여준 것이었다.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가 자신의 군주를 폐하는데 앞장섰다는, 다소 믿기 힘든 역사적 사실은 그가 고려에 대한 충심을 지키는 또다른 방식으로 그려졌다. '정도전'의 극본을 담당한 정현민 작가의 필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또한 이는 정도전이 이인임의 앞에서 "당신 덕분에 유자의 몸으로 역성혁명을 꿈꾸는 괴물이 되었소이다"라 했던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정몽주의 폐가입진 주장은 그에게 "새 나라의 문하시중이 되어 화합의 정치를 펼쳐달라"고 부탁한 오랜 지기(知己), 정도전과의 정치적 결별을 알리는 장치이기도 한 것이다.

앞서 정몽주는 이성계를 향해 "백성의 눈물을 대감이 닦아주려 하지 말라. 그것은 군주의 일이다"라고 경고했었다. 이날 역시 정몽주는 "역성혁명이 나의 진심이라면 어쩔 것이냐"라고 그를 떠보는 이성계에게, "선위를 한다면 대감의 즉위식 때 자결을 하겠다"다고 초강수를 둔다. 이어 "대감은 평생 피흘려 지킨 고려의 충신으로 남아달라"며 우왕과 창왕을 제거하는 모든 과정에 자신이 앞장설 것을 천명한다. 자신의 목숨과 정치적 신념을 담보로 한 정몽주의 협박 아닌 협박에 이성계는 "포은과 독대를 하면서 '이 사람의 임금이 되고 싶다, 포은 만큼은 반드시 내 신하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며 감복했다.

결국 이성계를 보위에 앉히려던 정도전 일파의 계획은 정몽주의 방해에 수포로 돌아간다. 정몽주를 반대할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성계가 한 발 물러선 뒤, 정몽주의 '폐가입진'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정몽주는 바로 중신들을 대동한 채 왕대비 안씨(김민주 분)를 찾아가 "금상은 신씨다"라며 폐위 교지를 요구한다. 믿었던 정몽주의 배신에 왕대비는 "이러는 것 아니다"라며 눈을 부릅떴지만, 결국 정몽주는 왕대비에게 교지를 빼앗아 들고 편전으로 향한다. 차마 어린 임금과 그 어미를 바라보지 못하고 "폐주 신창과 폐비 이씨를 끌어내라"며 말한 정몽주는 주인이 쫓겨난 채 비어있는 편전에 끝내 주저앉는다. 눈에 피가 맺힐 듯 허공을 노려보는 정몽주의 눈가에 분함이 눈물로 맺혀 흐를 때,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버린 정몽주의 결단은 모든 이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세상을 등지고 싶을만큼 절박한 상황에서 대의를 위해 '정신적 자결'을 감행했던 그의 절개는, 차라리 용기라 부름이 옳았다.



이후 재위기간이 고작 3년에 불과한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이 보위에 올랐다. 그 역시 이성계의 허수아비로 기억됐던 역사를 거부한다. 그는 '정도전' 속에서 풍전등화 상태의 고려 사직을 지키기 위해 짐짓 어리석은 체를 하는 입체적 인물로 재탄생해 기대를 모으고 있다.

10일 '정도전'에서는 "왕씨의 나라를 위해서 과인은 바보가 될 것이오"라 말한 공양왕이 고려의 재기를 위해 정몽주를 포섭, 도당에서 물러난 이색을 복귀시키려 애쓰는 장면이 방송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