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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퍼지, The Purge


purge

1. (조직에서 사람을, 흔히 폭력적인 방법으로) 제거[숙청]하다

2. (나쁜 생각, 감정을) 몰아내다[없애다]

이외에도 'purge'라는 단어는, 무언가를 '깨끗이 하다'나 '정화하다'의 뜻을 담고 있다. 여느 미국식 영화들이 그러하듯, <더 퍼지> 역시 미국의 찬란한 영광이라는 거대서사 속의 불순물을 조명하고 그것을 제거하는 과정을 그린다. 다만 현실에 다소 과격한 상상을 녹여내어, '효율'의 명목으로 행해지는 그 제거과정의 비인간성을 노골적으로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다. 일년에 단 한번, 12시간 동안 미국 전역은 무법지대가 된다. 모든 미국인들은 일년간 억눌러온 분노를 폭력으로 분출하는 것을 국가적 차원에서 허락받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은 효과가 매우 좋아서, 실업률과 범죄율은 추락하고 미국은 전에 없던 호황을 누리게 된다. <더 퍼지> 안에서 2022년의 미국에 이미 정착해 있는 것으로 나오는 이 'purge'라는 '연례행사'는 사실 법제화만 되어있지 않았다 뿐이지, 작금의 현실에서도 목격되고 있는 차별과 폭력을 구조 속의 구성원에게 행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정기적으로 짐승이 되는 시간을 국가로부터 약속받는다는 설정은 신선하기도 하고, 현재의 구조에 대한 매우 효율적인 비유로서 주효하다. 이미 오랜 시간 수많은 컨텐츠들을 거쳐 클리셰화된 '약육강식'이나 '승자독식'의 논리가 매우 일차원적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그것이 현실이라는 점, <더 퍼지>가 그것을 잘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는 모두 이의가 없을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퍼지>는, 사실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은 영화다. 개인적으로는 단점 뿐인 영화라 말하고 싶을 정도다. 'purge'가 권리이자 의무로 상정된 이후 안정된 사회에 아직도 남아있는 '불순물'들에 감히 국가가 손을 댈 수 없는 사회에서, 그 칼자루를 일반 시민들의 분노에 넘긴다는 비겁함에 분노하다가도 정신이 퍼뜩 들어버리는 것은 내러티브를 진행시키는 모든 과정들의 빈약함 때문이다. 완벽해 보이는 2022년 미국의 축소판인 제임스 샌딘(에단 호크 분)의 가정에 끼어든 조이(에드레이드 케인 분)의 남자친구 헨리(토니 올러 분)는 사실 대세에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는 아니다. 사실상 <더 퍼지>의 '엑스맨'은 샌딘 가의 막내 아들 찰리(맥스 버크홀더 분)였다. 모든 갈등의 시작과 끝은 이 찰리라는 인물로부터 기인한다. 이 복병이 영화 안에서 갖은 갈등을 만들어내도록 하는 동기는 하잘것없는 '정의', 근거없는 '공명심'이다. 차라리 이 아이가 숨은 능력자였다면 오락적 재미는 훨씬 더했을텐데, 실상은 아버지의 팔에 기대어 그의 팔을 피가 나도록 꼬집고 있는 꼴이다. 샌딘 가족을 엄습해 오는 무시무시한 무기와 악당들의 압박에도, 영화가 끝날 때까지 가족들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는다. 피가 빵빵 터지기를 하나, 설정들이 납득이 가기를 하나, 여러모로 가슴이 답답해온다. 찰리가 구해 줌으로써 가족을 위험에 빠뜨리게 만든 인물, 노숙자(에드윈 호지 분)가 마지막 순간 가족을 구한다는 설정도 그 유치함이 미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한다. 이쯤되면 감독은 현실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인지, 상상 속에 그러고 있는지, 사회를 고발하고 싶은 것인지 그저 묘사하고 싶은지 모든 것이 아리까리해진다. 가장을 잃고 꼼짝없이 다음 해의 '퍼지'를 기다려야 하는 가족은 어줍잖은 공명심에 복수조차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는 철저히 <배틀로얄>의 노선을 따랐어야 한다. 미국의 어두운 면을 비춘다고 나선 주제에 그 미국을 지탱하고 있는 백인 중산층 가정의 승리를 '정의에 기대어' 묘사해서는 안됐다. 어떠한 오락적 쾌감도 느끼지 못했고, 감동도 없는 이야기를 굳이 돈주고 봐야할 이유는 없다. 85분의 짧은 러닝타임에도 극장을 뛰쳐나오고 싶을 정도로 진부하고 지루했던 이야기, <더 퍼지>에는 별 한 개도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