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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슬러, The Counselor


<카운슬러>의 인트로는 몹시 근사하다. 등장인물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먼저 목소리가 흘러 나온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너무나 익숙하다. 우리는 이내 카메라가 비출 인물의 얼굴을 알고 있다. 이윽고 클로즈업된 화면에, 마이클 파스밴더와 페넬로페 크루즈가 모습을 드러낸다. 감독이 배우에게 느끼는 자부심과 배우 자신이 스스로에게 느끼는 자부심이 동시에 관객에게 전달되며, 배우 고유의 아우라에 압도당한다. 하비에르 바르뎀과 카메론 디아즈의 등장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실 이 초반부로 소개한 것은 현실세계의 배우들과 감독일 뿐, <카운슬러>의 등장인물들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다. 하지만 스크린을 넘쳐흐르는 그 자신감에, 이어질 이야기를 기대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래서 바짝 집중하고 이야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대체 이 <카운슬러>라는 영화의 요지가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다. 모든 캐릭터는 이 영화 안에서 평면을 걷다 못해, 죽어 있다. 마이클 파스밴더는 왜, 모두에게 '카운슬러'라고 불리는가? 왜 범죄에 가담하게 됐는가? 하비에르 바르뎀과의 관계는? 카메론 디아즈가 모든 것을 계획하고 방조했다는 것이 반전인가? 멕시코의 만연한 폭력성의 고발이라기엔, 한국 조폭영화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는 일들이 아닌가? 한 순간의 선택으로 어떤 미래도 바꿀 수 없다는 교훈을 남기기 위해서? 그래서 이 고급 배우들을 무기력한 존재로 그려야만 했던 것인가? 게다가 거의 영화 절반을 사랑타령, 운명타령으로 떼운 후에야 겨우 전개되는 범죄 사건의 피상적인 연출은, 겨우 따라가볼까 하면 끝나 있다. 마이클 파스밴더의 눈물 콧물 침범벅된 얼굴만이 남는다. 스릴러가 아니라 느와르라서? 어디에 가면 이런 느와르가 있단 말인가? 공식 파괴도 정도껏 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연출을 '불친절'이라는 미화된 용어로 요약하기에는 크게 무리가 있어 보인다. 심지어 중간중간 등장인물들의 대화에서 뜬금없이 던져지는 잠언스러운 개똥철학들은 흐름을 뚝뚝 끊는 방해물이 되어 버린다.


영화에 갖는 불만을 뒤로 하면, 한국에 <카운슬러>를 수입해 온 후의 번역과정을 굉장히 성의없는 것으로 치부하게 만드는 자막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작금의 영화 자막에 현지화 목적으로 시쳇말들을 집어넣는 경우가 왕왕 있었는데, 차라리 그게 나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구어인 대사들을 죄 번역투로 바꿔 놓아 자체 히어링을 유도한다. 그리고 영어 외의 언어들은 아주 간단한 인사말 정도만 자막화되어있어서, 번역 감수과정이 있었는지조차 의문이 들게 만든다.


주연급 다섯 배우들의 오랜 팬이다. 그러나 내가 여태까지 훑었던 그들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이렇게 평면적인 그들은 없었다. 리들리 스콧이 감을 잃은 것일까, 그저 이런 장르에 취약할 뿐인 것일까? 끝내 찜찜한 의문만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