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과정이다. 모두에게 '죽음'이라는 같은 결과를 낸다는 점에서,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는 인간이 갖고 있는 차별화 욕구나 인정욕망 따위와 맞물려 상당히 중요한 것이 된다. 그러나 누군가의 인생이라는 하나의 과정은, 마치 지문이나 홍채와도 같다. 완벽하게 같은 것은 이 세상에 두 개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사실 그 겉모양은 거기서 거기다. 우리가 남들의 인생을 접했을 때 아연하는 부분도, 공감하는 부분도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으로서의 인생과 가장 유사한 사건이 바로 연애다. 두 사람이 나름의 다양한 계기를 통해 사랑을 느끼고, 자신들의 관계를 '연애'로 명명한 순간 사건이 시작되어 어떻게든 끝을 맺는다. 또한 이 '연애'라는 사건은 주인공도 내용도 전부 다르지만, 같은 이름을 하고 있다. 사람 사는 것이 다 똑같다고,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타인의 인생에 함부로 뭐라 말곁을 달 수 없듯이 연애 역시 제 3자가 그 내막을 완벽히 알 수는 없다. 남들이 구질구질하다 하는 연애가 당사자들에게는 가장 찬란한 기억일 수도 있으며, 모두 아름답다 칭찬하는 연애가 사실은 속이 처절히 곪아 있어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연애의 온도>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 형식을 사용해 이미 끝난 연인의 관계를 집요하게 역추적하는데, '결혼'이라는 모종의 종착역까지 도달하지 못한 채 '끝나 버린' 이야기인 탓에 추접스럽고 구질구질한 느낌이다(실제로 영화의 대부분이 그런 인상을 주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그 끝난 연애의 과정을 바라보는 관객들은 그 질척한 사건 속에서 불쾌감에 시달린다기보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아름답게 반짝이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 모든 사람의 인생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그 자체로 보석이라면, 인생을 이루고 있는 한 부분이자 그것과 꼭 닮은 연애 역시도 보석이다.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들이 아름답다는 것 외엔 어떤 미화도 없는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빛난다.
그냥 연애도 아니고 사내연애다. 종일 붙어있으니 좋을 때는 끝도 없이 좋지만, 사이가 나빠지면 주변 사람들까지 좌불안석으로 만드는 그 악명높은 사내연애담(유사품으로 CC가 있다). <연애의 온도>는 사내커플의 연애담이라는 커다란 이야기 안에 직장 생활과 관련된 다큐영화를 제작한다는 설정을 끼워 넣어, 현실적 묘사와 동시에 연애의 당사자들과 주변인들이 장영(김민희 분)과 이동희(이민기 분)의 사랑을 사건 바깥에서 바라보며 그것을 사건과 별개인물인 PD에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제시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때 당사자인 장영과 이동희는 쿨한 척을 하고 주변인물들은 평소보다 더 솔직해진다는 점이다. 연애담을 담은 수많은 영화가 연인들의 행동을 보여 주며 그들의 솔직한 감정을 느끼도록 하는 평이한 방식을 사용하는 것과 다르게, 이러한 설정은 주인공의 말과 행동의 낙차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웃음과 공감을 동시에 주는 것이다. 막 헤어진 두 연인은 PD와의 인터뷰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행동하지만, 실상은 질질 짜면서 주변 사람들을 붙잡고 진상을 부리고, 그 주변인들은 연인들 앞에서는 위로하고 달래는 척 하지만 PD 앞에서는 오만 짜증을 다 부리는 등 그야말로 '날 것'의 현실을 보여 주며 영화를 보는 내내 '빵빵 터뜨려' 준다. 다만 분노조절장애 상담 좀 받았으면 좋겠다 싶을 동희의 행동이나 그에게만 쉽게 풀리는 회사 상황들은 다소 몰입도를 떨어뜨리기는 하지만.
<연애의 온도>는 이처럼 웃음 위주의 가벼운 연애 이야기같지만, 연애 이외에도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에게 관계의 단절과 지속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도 보여 준다. 영은 동희와 처음 헤어진 영화 초반 인터뷰에서 '안 맞으면 빨리 헤어지는 것이 좋다', '상대가 헤어져서도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이러한 태도는 동희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수많은 연애상담글을 몇 개만 훑어 보아도, '이런 점만 빼면 벤츠(완벽한 연인을 일컫는 인터넷 용어)다'는 글에 '그런 점 때문에 똥차(벤츠의 반대말)니 헤어져라'는 리플이 달린다. 그런데, 관계란 것이 그렇게 쉽게 끊어지고, 맺어질 수 있는 것일까? 내가 손해보는 것이 싫어 관계를 해제한다는 것은 과연 옳은가? 그러면 엄청난 개인적 손해를 감수하면서 관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것일까? 일반화된 정답을 영원히 찾을 수 없을 난제다. 관계란 인생에서 단 하나도 맺지 않고는 살 수 없을만큼 어렵고 무겁지만 언제든 가볍고 쉽게 생성되고 또 그렇게 끊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도 나지 않는 이유로 한 번 헤어진 영과 동희는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다시 이끌려 만나지만, 깨졌다 다시 붙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서운한 것도 말하지 못하고, 싸움을 피하기 위해 아예 만남을 줄이려고도 한다. 그리고 결국 그런 이유때문에 다시 파국을 맞는다. 두 번째 헤어지는 자리에서 영과 동희는 서로에게 자신들이 이 연애를 다시 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를 말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러한 부르짖음들은 공허하게 흩어질 뿐이었다. 노력들이 허무하게 흩어지더라도, 그 둘은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영과 동희의 두 번째 헤어짐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관계에 균열을 살짝 벌리는 것은 너무나도 간단하지만, 그 틈이 점점 벌어지는 것을 막는 것은 반대로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었다. 의아할 정도로 쉬웠던 이 영화의 마무리가 사실은 결코 쉬울 수 없었던 이유다.
'끝이 보이는 연애'가 싫다고들 하지만, 모든 인생이 끝을 향해 달려가듯 연애는 장기적으로 봤을 때 언젠간 끝이 난다. 그래서 연애도 과정이다. 관계를 잇기 위해 벌어진 틈을 '간절함'으로 메우느냐 마느냐를 고민하는 그 찌질한 과정들은, 그럼에도 빛난다. 영과 동희는 결국 해피엔딩을 맞았을까? 그리고 나의 과정들은 해피엔딩으로 가고 있을까?
post script. 이 영화의 가제가 <헤어지다..>였다고 하는데, <연애의 온도>나 <헤어지다..> 모두 영화를 잘 살리지는 못한 작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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