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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고 : 분노의 추적자, Django Unchained


최근에 '보그병신체'에 이어 '인문병신체'의 존재를 주장하는 글(borderland, '인문학이라는 제국의 언어 1', http://blog.naver.com/borderland?Redirect=Log&logNo=130082419349)을 읽었다. 이 글의 주요골자는, 조사를 제외한 나머지 단어들을 전문용어를 빙자한 외국어로 대체해 보는 사람을 아연하게 만드는 '보그병신체'와 유사한 맥락에서 '인문학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외제인 철학 개념용어들을 사유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인문병신체'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진중권이나 이택광 류의 학자들이 대중적인 글쓰기를 할 적에 인문학을 제국주의적으로 오용하고 있음을 지적하는데, 격한 공감과 별개로 사실 내가 이 글을 읽으며 <장고 : 분노의 추적자> 리뷰와 연관시키고자 했던 것은 거기까지 들어가지는 않고.. 어떤 개념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그 개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나름의 사유를 하느냐의 문제가 이 영화에 적용된다고 느껴졌다. 기실 이렇게 영화같은 콘텐츠를 접한 후 리뷰를 적는다는 것 자체가 사유의 한 과정이기는 하지만, <장고 : 분노의 추적자>는 그러한 사유 자체가 불필요하거나 무의미한, 이미 하나의 고유명사가 된 '받아들여야 하는 무언가'라고 말하고 싶은 영화였다. 단순한 오락영화라 사유할 필요가 없다고 하려는게 아니라, 그 자체로 감독과 영화를 하나의 조류로 만드는 완벽함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장고 : 분노의 추적자>의 원작격인 세르지오 코르부치의 66년작 <장고>는 마카로니 웨스턴의 원조라고 볼 수 있으며, 동양의 미이케 다카시 감독도 이에 영향을 받아 <스키야키 웨스턴 : 장고>라는 영화를 만들 정도로 컬트적인 흥행을 한 작품이다. <장고>의 주인공인, 관을 끌고 다니는 허름한 복장의 총잡이 장고(프랑크 네로 분)가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는 닥터 킹 슐츠(크리스토프 왈츠 분)의 도움으로 자유인이 되어 그와 함께 현상금 사냥을 다니는 흑인 노예 장고(제이미 폭스 분)로 대체된다. 남북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은 같지만, <장고>는 갱단의 알력다툼 사이에서 아내를 잃은 남자의 원한을 그리고 있는 반면 <장고 : 분노의 추적자>는 주인공에게 아내의 구출이라는 유사한 동기를 부여하는 동시에 남북전쟁 당시 흑인 인권 문제를 노골적으로 파고든다. 사실 타란티노가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이하 '바스터즈')>을 만들기 이전 그의 작품들은, 다루고 있는 공간의 색채를 이야기에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에 다소 미국적인 냄새를 풍기기는 했어도 정치적 배경을 고려해 선과 악을 제시하는 이분법적 가치판단은 배제되어 있었다. 그의 영화를 깊게 파고들지 않더라도, 그 오락적 가치만으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스터즈>에서도 무엇이 옳다거나 그르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2차 대전 당시 독일을 절대악, 미국을 차악 정도로 묘사, 정치적으로 악함의 경중을 두는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은 분명하다. 처음 <바스터즈>를 보았을 때 타란티노의 팬으로서 다소 실망감을 느꼈던 것도, 전작들과는 달리 그가 꾸며낸 배경이 아닌 탓에 어쩔 수 없이 그의 세계에 끼어드는 가치판단과 그것을 토대로 만든 등장인물들의 개인사가 거시적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었다. 나치 선전 영화의 주인공이 된 전쟁영웅이 자신의 영화를 보며 괴로움에 자리를 뜨는 장면과, 시사회장에 남아 적을 사살하는 장면을 환호하며 바라보는 히틀러와 괴벨스가 오버랩될 때 나치의 머릿가죽을 벗기는 '개떼들'의 폭력까지 괜히 그저 웃고 지나갈 수 없는 것처럼 되어 버린다. 그리고 <장고 : 분노의 추적자>에서도 그의 주특기인 화려한 색감의 액션씬을 곧이곧대로 즐길 수 없도록 흑인 인권 문제라는 현실이 끼어 든다. 하지만 타란티노의 작품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문제의식들이 전작에 이어 연속적으로 제기되는 의외의 상황들은 더이상 실망감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바스터즈>가 하나의 목적으로 수렴되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로따로 제시한 후 그것들을 한데로 봉합하는 대수술을 감행할 때 받았던 약간 늘어지는 느낌이 이 영화에는 없다. 모든 것이 그의 장기인, 유치해 보일 정도로 단순화된 연출을 거쳤기 때문이다. 또한 <바스터즈>의 나치 장교 '한스 란다' 역으로 분했던 크리스토프 왈츠가 '닥터 슐츠 킹'이라는 인물을 연기하며, 피해자격인 장고와 가해자격인 캔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의 가운데에서 관객들에게 주어질 모종의 가치판단을 대신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관객 대신 고민하고, 관객 대신 사유한다. 완전히 악한 사람은 있을지언정 완전히 선한 사람은 없었고, 영원히 강한 사람은 있어도 영원히 약한 사람은 없었던 그의 영화 세계에 목적이나 큰 줄기의 이야기 대신 그 자체로 이야기의 줄기들을 잇는 새로운 인물형의 등장은 그의 이야기를 약화시키지 않는 섬세한 연출로 타란티노의 변화를 정당화한다. 또한 타란티노 스타일의 빵빵 터져 주는 유머와 통쾌한 총격전, 명배우들의 열연을 죄 차치하고라도 <007 스카이폴>을 능가하는 캔디 저택 전소씬은 기립박수를 치고 싶게 만드는 시원함이 있었다. 


타란티노가 세르지오 코르부치의 <장고>에서 가져온 것은 시대적 배경과 서부극이라는 설정, 장고라는 주인공의 이름 뿐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전형적이면서도 신선한 '타란티노형 서부극'이라는 새로운 조류를 본다. 상당히 심각한 문제의식의 개입에도, 속수무책으로 감각을 자극하는 완벽한 영상 덕에 상기했듯 그의 영화는 이미 '받아들여야 할 무언가'다.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장고> 원작의 주제곡이 흘러나올 때 느껴졌던 전율이 아직도 생생하다. 개인적으로는 개봉하면 IMAX관에서 틀어 주어서 큰 화면으로 보고 싶다는 자그마한 바람이.. 기다리기 힘든 3월 21일 개봉을 기다리며, Auf Wiederse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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