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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1

데드폴, DEADFALL


영화 속 '제이(찰리 헌냄 분)'와 '라이자(올리비아 와일드 분)'가 눈 앞을 가로막는 눈을 뚫고 안착한 술집의 주인이 말했다. '남편은 고를 수 있어도 시댁 식구는 고를 수 없다'고. <데드폴>의 주인공들은 세상이 '순리'라거나 '운명'이라고 명명한 모종의 규칙들을 찰떡같이 지키지도 개떡같이 거스르지도 못했지만, 그 부조리함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세상을 지배하는 논리인 '강함'에 반항하기 위한 '강함'을 좇는 삶을 산다. 그들의 소원은 단지 평범한 행복이었을 뿐이지만,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승부조작꾼으로 비유된 '강한 세상'은 그것을 쉬이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어코 행복을 찾고자 그들을 괴롭히던 자들을 죽이며, 그들 안의 강함을 꺼내어 휘두르고 만 '애디슨(에릭 바나 분)'과 제이는 범죄자라는 낙인을 이마에 새긴 채로 살아가야만 한다. 애디슨과 제이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세상이 그들보다 강하며 그렇기에 부조리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과 계속해서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힘을 행사하며 쫓기는 신세가 되어야 하는 것, 이 둘 뿐이다. 그리고 끝내 세상에 굴복하지 못한 이 둘의 운명은 교묘하게 얽힌다.


우리는 자의에 의해 태어나지 않는다. 또한 부모의 바람이 담긴 이름을 부여받고, 그 이름의 뜻처럼 아름답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타인은 나의 이름을 부르고, 나도 그의 이름을 부른다. 이름이 불려지지 않는 삶은 의미가 없기에 사람들은 서로를 부르고, 서로의 역사를 얽으며, 의지하고 이용한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의 삶은 시작부터 끝까지 온전한 자신일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눈보라 속에서 만난 제이와 라이자는 원래의 이름 대신 서로 마음에 드는 이름을 붙여주고 그것을 부른다. 그전까지 이어져 오던 절망의 시절을 말하고 있는 본명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부르며 새로운 세상을 기대한다. 하지만 아무리 지나 버린 과거라도, 그 과거를 짊어져온 인간이 죽고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그것을 완벽히 지워낼 수는 없다. '라이자'라는 이름의 망령이, 그녀가 '패트리샤'로 새출발하고 있는 것을 막고 있었다. 서로 사랑하게 돼버린 탓에 모든 과거마저도 공유하고 싶어진 라이자와 제이는 결국 스스로의 본명을 밝힌다. 그리고 막장 드라마를 방불케 할 정도로 정신없이 얽히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는 행복을 찾아 돌아온 제이의 본가에서 모두 만나게 된다. 친동생 라이자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애디슨, 제이를 이용하려다 사랑에 빠지게 된 라이자, 승부조작에 연루되어 감방신세를 지고 나오자마자 승부조작꾼을 죽이고 만 제이, 그리고 평생 가족과 정의를 지키며 살아온 제이의 부모, 보안관의 딸이자 여자라는 이유로 과보호에 시달려온 마을의 부보안관 한나(케이트 마라 분)이 한자리에 모여 기괴한 추수감사절 만찬을 드는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이다. 혼자서는 상처도 받을 수 없고, 행복도 느낄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총과 주먹이라는 '강함'으로 덮으려는 가련한 발버둥이 결국 동생의 총알에 거꾸러진, 괴물이 되고 만 애디슨의 죽음으로 갈무리된다.


인간이 태어나기 전 이미 세상은 존재했고, 내가 태어나기 전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이름을 부르고, 서로의 역사를 얽으며 살아왔다. 나란 존재 역시 부모님이 주신 이름대로 살고자 한다고 배웠기에 그리 하고 있고, 타인의 이름을 부르고 나역시 불리며 산다. 그 복잡한 역사의 얽힘과 함께 지속되온 부조리함은 어떻게 타파할 수 있을까.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에는 '사람 되긴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맙시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우리에게 이름이, 부모의 바람이, 그리고 인간의 역사가 주어진 이상 완벽히 홀로 선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조리함만이 아니라 행복도 느끼고 살아간다. 완전히 개인으로서 살 수는 없어도, 스스로를 포기한 채 괴물이 되어 버리는 것은 모든 행복의 기회를 져버리는 선택이 아닐까. 결국 애디슨은 괴물이 되었고, 손 안에 강함을 단단히 쥐었지만, 끝내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