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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일 퀴어 3연작 <백야>, <지난 여름, 갑자기>, <남쪽으로 간다>

이송희일의 영화 속 대사에는 상상을 뛰어 넘는 파괴력이 있다. 가장 구질구질하고 징한 사연이 연애라고 한들, 스크린이라는 필터를 통해 보여지는 그것은 온갖 불순물들을 걸러낸, 가장 미화된 완성품의 형태로 관객들에게 제공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 속의 사랑을 꿈꾸고, 그 안에서 등장인물들이 읊는 명대사들을 주워 섬긴다. 그런 방식으로 아름다울 수 만은 없는 사랑 이야기의 거친 면들을 영화의 아름다움으로 포장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물론 이송희일의 퀴어 연작, <백야>, <지난 여름, 갑자기>, <남쪽으로 간다>에도 한번쯤 재현하고 싶어질 만큼 아름다운 상황들과 대사들이 넘친다. 그러나 이 세 작품에서 감독이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어 말하는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는 외려 비현실적일만큼 평범해서 허를 찌른다. 이 뜻밖의 평범함은 내뱉어지는 순간 곧장 비범해지는데, 우리가 줄곧 로맨스 영화에서 봐 왔던, 날것인 척 하는 동화적 언어들과는 달리 섬세한 경험의 조탁을 거친 언어들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구걸해 본 적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고, 또 그런 사람들만 공감할 수 있는 그런 말들. '그리워 하면 언젠간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만이 존재하지는 않는, 현실에서조차 잊고 지내던 진짜 현실적인, 진짜 평범한 사랑들이 이송희일의 영화에는 있었다. 예쁘게 포장된 사랑은 발에 채일만큼 흔해진 이 세상에서, 평범해빠진 그들의 이야기는 예쁘지만은 않아서 비범하다. 담임을 하고 있는 학생 상우(한주완 분)의 끊임없는 구애를 거절하는 선생 경훈(김영재 분)의 흔들리는 마음을 끌어안은 상우가 "수업시간에 나 훔쳐 봤잖아요, ...나한테만 말해 봐요."라고 속삭이는 장면이나, 정사장면을 찍은 카메라를 두고 진흙탕에서 준영(전신환 분)과 몸싸움을 하던 기태(김재흥 분)가 준영의 밑에서 '나 없는 사람 취급 하지 말라'며 흐느끼던 장면은 죽어가던 연애세포에 갑작스런 전율을 일도록 하기까지 했다. 그 짜릿함이란 평범함이 전제되지 않으면 허락되지 않는 절절함이다. 게다가 널리고 널린 이성애 영화보다 훨씬 섬세한 감정선은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 이상으로 벅찬 여운을 준다. <백야> 속 원규(원태희 분)에 대한 태준(이이경 분)의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이 모종의 동정에서 사랑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별다른 계기에 대한 언급이나 상황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았음에도 어렵지 않게 이해하며 따라갈 수 있었다. 심지어는 하룻밤의 짧은 연애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원규의 주머니 안으로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어 구겨 넣은 주제에 '꺼지라'고 하는 태준의 뜨악한 대사마저도, 자꾸만 원규가 탄 택시가 사라진 방향을 돌아보던 태준과 공중전화박스 앞에서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던 원규의 가슴에 차게 닿아오는 바람을 느낄 수 있게 했다. 몇 마디의 말들로 표현된 그들의 감정이 관객에게로 왔을 때, 그것을 다시 말로 치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감독 역시도 말로 다 할 수 없던 것들을 영화를 통해 전부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각 작품의 배경이 종로, 학교, 군대라는 점은 게이들에게 억압적일 수 없는 상황을 효과적으로 보여 주는 역할을 했다.


이송희일 퀴어 3연작의 강점은 대사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의 독립영화들이 '날것'에 깊이 천착한 탓에 미장센에 공을 크게 들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경향이 있는데, <백야>, <지난 여름, 갑자기>, <남쪽으로 간다>는 영화 안의 세계 속 미장센을 구축하는데 있어서도 비범하다. 김경묵 감독의 <줄탁동시> 속 '현'이 보여준 섬세한 몸짓에서 받았던 마음을 간질이는 느낌이 세 작품에 전체적으로 흐르며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특히 영화 속의 자잘한 소품들이 스스로 등장인물을 자처하며 관객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등장인물이 그것들을 만지는 동작 하나하나가 대사로 미처 말하지 못한 감정들을 대신 표현하는데, <지난 여름, 갑자기>의 헤드폰과 담배, 차에 달린 인형이 그랬고, <백야>의 원규가 딸깍대던 볼펜이 그랬으며, <남쪽으로 간다>의 술과 립스틱이 그랬다. 그리고 각 작품 속에서는 유독 주인공 두 명이 한 화면 안에 갇히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이는 그저 둘이 함께 있는 상황만을 말하는데 그치지 않고 단순한 고개의 각도마저 등장인물의 거리감을 나타내는데 주효한 역할을 하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사진작가가 순간을 붙잡아 사진을 만들고 화가가 대상을 화폭에 옮겨 정물로 만들며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감독이 스크린에 옮겨낸 주인공들의 위치와 표정은 그 순간순간이 의미를 가진 이야기로 화(化)하고 있었다. (<남쪽으로 간다>에서 벌거벗은 채 풀숲을 뛰던 준영과 기태의 뒷모습은 나체로 빛을 향해 달리는 모습을 찍은 라이언 맥긴리의 사진을 연상케 했다!)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하고 싶은 말이, 보여 주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호흡 조절에 다소 실패한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백야>에서 태준이 원규에 대한 마음을 넌지시 내비치며 하는 대사들은 그것의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조금의 간격도 두지 않고 빠르게 뱉어지는 것에 비해 원규의 응답 속도란 그의 굳게 닫힌 마음이나 주저함을 느끼도록 하는 것 이상으로 지루하게 늘어지는 편이다. 또 전체적으로 짧은 러닝타임과 어울리지 않는 롱테이크들이나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은유하는 아름다운 미장센들이 너무 잦게 사용된 탓에 몸을 뒤척이게 하는 답답함도 있었다. 영화를 보며 얇은 잠언집에 깨알같은 크기로 여백없이 꽉 들어찬 글자들을 보는 듯한 느낌이 종종 드는데, 한창 이입됐던 감정이 점점 흩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고 나와서도 말로는 다 적지 못할 여운들이 원규가 태준의 허벅지에 함부로 '지문을 찍은' 것처럼 뚜렷이 그리고 오래 남아 있다. 너무 구질구질해서 슬플 틈도 없고, 너무 징해서 기쁠 틈도 없는, 너무 평범해서 외려 특별한 그런 세 개의 이야기가 <백야>, <지난 여름, 갑자기>, <남쪽으로 간다>라는 이름을 단 채 스크린에 오롯이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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