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몇몇의 '종이남친'들이 있다. 배우나 가수같은 경우는 그들이 나와 같은 공기를 호흡하고 같은 땅을 밟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고, 맘만 독하게 먹으면 실제로 볼 수도 있으며, 어찌어찌 연이 닿으면 지인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내게 그다지 비현실적인 존재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2D남친'들은 그렇지가 않다. 철저히 현실 바깥의 영역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더 애틋하다. 그중에서도 주요 멤버들을 꼽아보자면 <꽃보다 남자>의 도묘지 츠카사, <카우보이 비밥>의 스파이크 스피겔, <사무라이 참프루>의 진, <슬램덩크>의 강백호, <프린세스>의 토르 공작, <빅토리 비키>의 소니 하트, <은비가 내리는 나라>의 도깨비 대마왕, <휴머노이드 이오>의 이오, <명탐정 코난>의 신이치, <소년탐정 김전일>의 김전일, <슬레이어즈>의 제로스 등등이 있겠다. 그리고 그 중 탑3에 들만큼 애착을 갖고 있는 인물이 바로 <바람의 검심>의 히무라 켄신이다. 새 시대를 열기 위해 칼을 잡았던 그였지만, 그 덕에 더이상 검이 필요없는 시대가 도래하자 그간의 살육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역날검을 들고 다니는, 십자흉터의 미검사. 만화책은 물론이고 애니메이션 시리즈와 극장판까지도 모두 챙겨보고 소장했을 뿐만 아니라 <바람의 검심>을 읽은 시점으로부터 사무라이를 소재로 한 콘텐츠들에 천착하기 시작했을 정도로 나는 히무라 켄신을 좋아했다.
그렇기 때문에 <바람의 검심>을 실사판으로 영화화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대만큼 근심도 컸다. 혹여나 원작을, 켄신을 망칠까봐서 그랬다. 그리고 한국 정식개봉 첫날인 오늘, 나는 올겨울 최고의 한파도 마다않고 실물이 된 켄신을 보러 갔다. 아무리 못해도 중간은 갔겠거니, 하는 마음이었는데, 발도재 시절의 켄신(사토 다케루 분)이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나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적어도 겉모습의 재현만큼은 가슴이 뛸 정도로 완벽에 가까웠다. 주황빛이 도는 머리칼을 아래로 질끈 동여매고 긴 앞머리 사이로 안광을 내뿜는 그의 고독한 눈, 작고 마른 몸, 그리고 십자흉터까지. '셋샤와 타다노 루로우니'라며 예스런 말투를 나른하게 내뱉는 것마저 켄신의 현신이었다. 사토 다케루가 켄신 역에 캐스팅되었다는 말을 듣고, 꽤 어울리기는 하겠다고 생각했었지만 사실 카메나시 카즈야를 먼저 떠올렸었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 둘 중에 누가 켄신에 더 잘 어울리냐고 묻는다면 사토 다케루일 것이고 누가 더 연기를 잘 했을 것 같냐고 묻는다면 카메나시 카즈야다. 사토 다케루의 켄신은 원작을 꽤 깊이 연구했다는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 수록 연기에 다소 힘이 들어가서 과장되어 보이는 경향이 있다. 십자 흉터에 관련된 회상신에서 그의 걸음걸이는 유독 어색했고, 후반부 진에와의 결투신에서는 목소리를 그저 낮게만 잡았어도 됐을텐데 굳이 긁는 발성을 사용해서 그 순간만큼은 켄신 그 자체가 아닌 켄신을 연기하는 사토 다케루가 보였다. 만약 카메나시 카즈야가 켄신을 연기했다면 발도재 시절과 루로우니 켄신 시절의 간극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을 테지만, 그의 얼굴선에는 가끔 넘칠 때도 있는 요염함이 깃들어 있다. 굉장히 닮은 얼굴이지만 좀 더 남성답고 순수한 선과 진중한 목소리를 갖고 있는 사토 다케루가 연기 외적인 부분으로는 미세한 차이로 켄신 역에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바람의 검심>은 원작의 초반부, 사노스케-메구미-야히코-카오루-켄신이 만나 간류와 진에라는 악당을 처단하고 동료로서 뭉치게 되는 내용까지를 담고 있다. 켄신과 그의 동료들은 모두 세상을 살아가는 방어기제로서의 위악을 행한다. 악을 등에 짊어지고 참마도를 휘두르는 사노스케, 아편을 만들면서 사는 메구미, 강한 척 목도를 휘두르는 야히코와 카오루, 그리고 항상 자신에게 칼날을 겨누는 켄신까지. 그들은 그렇게 위악의 가면을 쓰고 만났지만 결국 카미야 도장에 모여 그 가면을 벗게 된다. 사이토 하지메는 '누군가 죽어야만 싸움이 끝난다'고 말하지만, 켄신은 누군가의 죽음이 또다른 복수를 낳기 때문에 그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되풀이되어온 복수와 원한에 관련된 이 난제를 푸는 것은 켄신이다. <레미제라블>의 마지막 장면처럼, 누구의 마음에도 원한이 없고 복수할 일도 없는 '평화의 시대'는 현실이 아니라 더욱 간절하다. 폐도령이 내려져 검과 사무라이들이 퇴물로 전락해버린 메이지 시대를 '평화의 시대'라 부른다면, 그 시대를 피로 일궈낸 이들이 평화롭게 살지 못하는 세상은, 정말로 평화로운 것일까?
post script. 주변인물들까지 원작에 근접한 재현에 성공했다고 생각하지만 메구미와 사이토 하지메는 부족한 면이 있어 보인다. 농염한 여의사 메구미를 아오이 유우가 소화해내기엔 그녀는 너무 청순했고, 원작에서 날렵한 몸과 매서운 눈으로 미부의 늑대로서 매력을 뽐냈던 사이토 하지메 역의 에구치 요스케는 너무 착해 보이는 아저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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