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베를린> 역시도 최동훈의 <도둑들>에서 맡았던 모종의 '아류'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한국 영화로는 거의 유일하게 장르의 원조격인 헐리우드 액션물에 근접했다는 느낌이다. 한국 영화에서 지속가능한 액션 캐릭터라곤 <장군의 아들> 시리즈의 김두한이나 <투캅스> 시리즈의 조형사/강형사 콤비, <공공의 적> 시리즈의 강철중 정도였고 이들 역시 시대를 풍미했지만 이미 기대치가 높아져버린 관객들의 눈에는 캐릭터와 스케일을 동시에 만족시킬 영화가 필요했었다. 영화를 보기 전 시사회 인터뷰에서 한석규가 속편의 여지를 남겼길래 그만큼 영화가 잘 뽑혔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이건 '노렸네 노렸어'다. 개인적으로는 너무 떠먹여주는 느낌이라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영화의 시작부터 마치 만화영화 캐릭터를 제시하듯이 주인공을 제외한 부차적인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직업 따위를 자막으로 명시하는 것을 보니 관객으로 하여금 주인공 캐릭터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하고, 지속가능하게 만들려는 의지가 절절이 드러난다. 그러나 주인공 표종성(하정우 분)이나 정진우(한석규 분)보다 악역인 동명수(류승범 분)이 확연한 존재감을 보여 주는데, 정진우가 해산될 위기의 '베를린팀'을 구해내는 과정은 표종성에 대한 조력으로만 묘사되고, 당의 명령이나 갑작스레 목숨을 버릴 정도로 샘솟은 애정에만 휘둘리는 표종성의 캐릭터는 평면적인 탓이다. 전체 내러티브가 동명수를 중심으로 짜여졌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모든 음모의 열쇠를 동명수가 쥐고 있었다. 다른 마초영화에서처럼 표종성의 아내 연정희(전지현 분)는 도구적으로 쓰였다는 점도 한계다. 때가 어느 때인데 통역관이 성접대를 하고 그 정도 사건의 증거를 정진수가 CIA에 정보교환의 대가로 제공한다는 설정이나, 연정희가 표종성의 아이를 가졌음을 밝히자마자 그녀가 망명하려 했다는 의심은 사라지고 가족애인지 사랑인지 모를 보호의지가 생겼다는 점도 내러티브의 연결고리로서 다소 촌스럽다. (영어나 독일어보다 어색하게 들리는 북한말-류승범만 일정 수준 이상으로 소화해낸 듯한-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한편 <베를린>은 여타 올로케로 진행된 영화들보다도 장소의 이국적 정서를-한국인 관객에 한정해서-효율적으로 썼다는 느낌도 든다. 내러티브를 떠받치고 있는 배경 자체가 베를린이라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낡은 목조가옥과 그래서 문이며 벽에 뚫린 총구멍들은 서부 영화를 연상시키며, 확실히 이국적인 맛이 있다. 다만 헐리우드 액션물의 명장면을 참고한 듯한 장면들이 종종 눈에 띄는데, 특히 최근의 <007 스카이폴>을 연상시키는 부분들이 아쉬웠다. 자잘한 부분을 제외하고 한 장면만 꼬집어 말하자면 표종성과 정진우가 가까스로 연합하여 연정희를 구하기 위해 동명수와 마지막 결투를 하는 장면의 배경은 이미 많은 영화에서 봤던 탓에 다소 창의력이 부족해 보인다. 거기서 보여주는 대규모의 폭발 장면은 CG가 말도 못하게 허접하다는 아쉬움도 남긴다. 카메라워크는, 장쾌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영화임에 비해 '나 올로케 했어요'라고 티내지 않고, 풍경의 조감에 천착한다기 보다는 인물을 중심으로 다양한 카메라 기법을 사용해서 확실히 캐릭터의 감정선에 집중했다는 느낌으로 꽤나 섬세하게 진행되는 편이다. 전체적 내러티브만은 친숙한 한국형에, 분명한 오리지널이지만 쉬운 말을 좀 어렵게 하는 것 같다는 감상을 받았다. 국제적 음모와 개인적 목적이 어느 정도의 경계 없이 한데 섞여 있고 등장하는 인물들이 죄다 복수와 이해관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사소한 인물이라고 그냥 흘려보냈다가는 이야기의 흐름을 놓칠 수 있다. 주요 내러티브인 북한 내에서의 정치적 갈등만 본다면 충분히 따라갈 수 있지만 한국과 아랍, 이스라엘에 독일까지 끼어들어 이야기의 현실성은 분명하더라도 단순함의 매력이 없다는 것은 액션물로서의 흠이었다. 그렇기에 <베를린>은 베를린이라서 빛나기도 했지만, 굳이 베를린일 필요는 없었다는 생각도 든다.
속편의 여지를 분명히 한 덕에 관객들은 다음 편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진행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게 되었다. <베를린>에서 느껴졌던 장점들은 더욱 보강하고 단점들을 소거해 나가야 지금보다 더 나은 '한국형 액션 첩보물 시리즈'가 가능할 것이다. 가장 아쉬웠던 단점인 주인공 캐릭터의 입체성을 보완하지 않으면 표종성과 정진우라는 인물들은 영영 악역의 보조인 이상한 주연으로 남고 말 것이다. 영화 시작 전 관크가 쏙 들어갈 정도로 몰입도 높고 스케일도 만족스러운 멋지게 잘 빠진 영화가 확실한 오리지널리티를 가진 '고전'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베를린>은, 그런 기대를 가질 수 있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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