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해준 감독은 신작 '나의 독재자'를 통해 이 '화양연화'를 다룹니다. 그러나 영화의 주인공 성근(설경구 분)과 태식(박해일 분)의 삶 속에서 이 단어를 찾아내는 과정은 너무나도 괴롭습니다. 아내도 없이 노모(손영순 분)와 어린 아들 태식(박민수 분)을 데리고 사는 무명배우의 이야기라니, 말만 들어도 반사적으로 콧날이 시큰해지는 것이 느껴집니다. 매번 맡는 배역이라곤 후배들에게 주조연을 내주고 남은 행인 1,2,3 뿐이지만 그저 내 능력이 모자랐겠거니 하며 너털웃음을 짓는 성근에게는 무대 공포증까지 있답니다. 이쯤 되면, 과연 이 남자에게도 '화양연화'가 올지, 궁금함이 앞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무대의 앞에서 자신이 무대 위에 선 순간을 상상하기만 할 뿐인 성근에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연극 '리어왕'의 광대 역에 '땜빵'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연출자(정인겸 분)는 그냥 대사만 읽고 내려올 것을 요구하지만, 성근은 잘 하고 싶었습니다. 늘 하찮은 배역밖에 맡지 못하는 아버지를, 친구들에게 '배우'라고 자랑하는 아들 태식에게 뭔가 보여 주고 싶었겠지요. 그러나 무대 공포증이 성근의 발목을 잡습니다. 과한 긴장에 흐른 식은땀이 성근의 광대 분장을 지우고 그의 맨얼굴이 드러나는 장면에서, 인생 가장 굴욕적인 순간을 맞은 성근의 좌절이 느껴집니다.
두 번째 기회는 첫 번째보다 더 의외의 순간에 찾아왔습니다. '나의 독재자'에는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에 앞서 정부에서 회담 리허설을 기획했다는 설정이 등장하게 되는데, 성근이 이 '독재자' 배역 오디션 참가 제안을 받게 된 것입니다. 기밀 사안인지라, 정부 측은 오디션 참가자들의 입이 무거운 지를 알아보기 위해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합니다. 그리고 성근은 이 폭력 속에서 '최후의 1인'으로 살아남게 됩니다. 오 계장(윤제문 분)의 지휘 아래 연기 교습 담당 허 교수(이병준 분)와 리허설 각본을 맡은 주사파 대학생 철주(이규형 분), 배우 성근까지 모였습니다. 담담하면서도 코믹한 톤의 연기로 정평이 나 있는 이병준의 매력이 영화의 미덕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어리바리한 성근에게 짜장면을 향해 감정을 폭발시킬 것을 주문하고, 용변을 보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연기 조언을 건네는 허 교수의 모습은 자못 진지하게만 보이는 '나의 독재자'에 웃음이라는 양념을 뿌립니다.
이처럼 '드림팀'의 지도와 독촉을 받으며 성근은 완벽히 '김일성'이라는 배역에 몰입합니다. 덩치도 김일성만큼 키우고, 의상까지 맞춰 입으며 김일성의 외양까지 갖춘 성근에게 오 계장은 "오더가 아직 내려오지 않았다"며 리허설을 차일피일 미룹니다. 그러던 중 남북정상회담이 무산되고, 성근은 첫 주연 무대를 잃게 됩니다. 처음 잡은 기회를 자신의 미욱함으로 놓쳐버린 뒤 겨우 만난 두 번째 기회를 빼앗겨버린 성근은, 자신의 무대를 삶으로 옮겨 옵니다. 주변인들은 그에게 '미쳤다'고 하지만, 내면적 갈등을 견디다 못해 자신 안으로 파고들어가 버린 성근의 모습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타의로 놓치고 말았을 때의 상실감을 적확히 표현하며 공감을 이끌어냅니다.
성근의 아들 태식은 더 이상 그런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게 됐습니다. 성근으로부터 도망친 태식은 생활고에 사채를 쓰고 다단계 사업에 뛰어듭니다. "돈이 목숨"이라고 말하는 태식의 고뇌 섞인 삶은 오롯이 성근을 향한 원망으로 점철돼 있습니다. 하지만 성근이 태식에게 처음으로 아버지 노릇을 할 수 있는 순간이 왔습니다. 김일성 대역을 대가로 받은 집이 재개발된다는 소식이 태식에 귀에 들어왔고, 태식은 그 집을 팔아 빚을 청산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쉬울리 없겠지요. 태식이 떠나 있는 동안에도 내내 김일성으로 살아온 아버지를 요양병원에서 데리고 나오며, 태식은 불순한 의도였지만 아버지의 입장에서 행동해 보려 합니다. 성근을 '수령 동지'라 부르고, 인민의 젖이 필요하다는 아버지의 말에 염소를 기르는 태식의 모습이 웃음을 자아냅니다.
그러나 태식은 점점 아버지를 이해해가는 자신의 모습이 버거웠습니다. 그렇게 미워했던 아버지, 자신으로 하여금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한 성근의 삶에 동화돼가는 자신이 심히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하려 했던 태식은, 아버지의 생명과 그가 고집스럽게 지켜왔던 집에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이끌림에', 평생을 저주했던 아버지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태식에게 성근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신이 마지막 무대의 리허설을 준비해 왔다는 사실을 넌지시 내비칩니다.
반전 아닌 반전에 깜짝 놀랄 새도 없이, 세월의 흔적을 얼굴에 잔뜩 묻힌 오 계장이 등장합니다. 드디어 성근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주연 무대의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관련 자료를 건네는 오 계장에게 성근은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내 아들이 볼 수 있게 해 주시오. 오 계장이 이를 수락하고, 태식은 평생 처음으로 아버지의 무대를 보게 됩니다. 드디어 대통령(전국환 분)과 마주한 성근은 생애 최초이자 최고의 연기를 펼칩니다. 대본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20년 간의 리허설을 통해 성근은 김일성 그 자체가 됐으니까요. 정말로 김일성이 된 듯한 '신들린' 연기에 대통령은 부담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좌중이 리허설장 문 밖으로 빠져나가는 순간, 성근은 20여년 전의 그날 태식에게 채 보여주지 못한 '리어왕' 속으로 빠져듭니다.
"여기서 누가 나를 알아보겠는가. 나는 리어가 아니다. 리어가 이렇게 걷느냐. 이렇게 말을 하더냐. 리어의 눈은 어디 있느냐. 지금 깨어있는 것이냐? 아니, 꿈이겠지. 내가 누군지 말해 줄 사람은 누구냐."
사실, 이 대사는 성근이 맡았던 광대의 대사가 아닌 리어왕의 대사입니다. 그러나 성근은 곧바로 광대로 변신해 광대의 말들을 내뱉습니다. 통째로 대사를 외울 정도로 사랑했던 연극을 마지막 무대에서 쏟아 붓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태식은 눈물을 흘립니다. 오 계장의 "예술이네, 미친 새끼"라는 핀잔에도, 성근을 향한 경외가 섞여 있었을 것입니다. '나의 독재자' 최고의 명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영화 내내 찾으려 애썼던 성근의 '화양연화'를 목격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무명배우이자 아버지였던 한 사람의 삶 속 최고의 순간을 목격하며 우리는 자연스레 우리의 아버지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대부분 '독재자'였습니다. 독재자라는 표현이, 무서운 다그침이나 회초리 같은 데서만 느껴지는 것은 아닙니다. 티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족들이 잠든 아버지의 손에서 리모컨을 빼내려 하는 순간, "아빠 안 잔다"라는 한 마디에 다시 자리에 앉고 마는 그 사소한 순간에도 우리 아버지는 독재자였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성근을 비롯한 우리의 아버지들은, 항상 가족 앞에 가장 빛나고 싶어했습니다.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었고, 가장 좋은 것을 보여 주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화양연화'를 태식과 공유하고 싶어 했던 성근처럼, 아버지들은 우리와 가장 좋은 순간을 함께 하고 싶어했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물론, '나의 독재자'는 여러 굵직한 주제들이 한데 모여 이야기가 되는 과정에서 다소 산만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성근은 자신의 예술혼을 불사르기 위해 김일성 안에 매몰됐던 것일까요? 아니면 가족 앞에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요?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면, 성근은 왜 더 영민하게 굴지 못했을까요? 이 모든 것들을 '나의 독재자'라는 한 편의 영화 속에 모자람 없이 담아내기에는 버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태식을 비롯한 관객들이 성근의 삶이라는 무대에서 '화양연화'를 찾아내는 과정을 담담히 그려내며 여러 메시지들을 제시합니다. 지난하고 고된 시간이었지만, '나의 독재자'는 직업인으로서의 성취가 주는 희열과 가족간의 이해를 한 장면에 녹여낸 성근의 마지막 무대만으로도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울컥함을 느끼게 해 주는, 감동적인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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