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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1

러시안소설, The Russian Novel


"내가 쓴 거, 한 번 볼래요?" 

예술이란 늘 그랬다. 모종의 물질 안에 정신이 담긴 유기체의 모습으로서 인간과 세상을 매개해왔다. 작품을 만들든, 그것을 평하거나 그저 감상하든간에 예술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인간들은 스스로 자신의 의미를 찾는다. 바로 여기에 예술의 존재 의의와 궁극적 목적이 있다. 설사 세상에 발표되지 못했거나 굳이 그러려 하지 않은 예술 작품이 있다한들, 그 자체로 예술가 자신의 내면은 물론 세상과 나눈 이야기의 결과물이다. 이세상에 예술이 없어진다 한들,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다. 기본적인 의식주에 전혀 지장을 주지 못하더라도 예술이 끝내 사라지지 않은 것은 예술의 이러한 역할 때문이리라. 그렇게 예술은 찰나에 누군가에게 붙잡혔을 뿐인 삶들이 가공된 무언가로, 거시적으로 본다면 삶 그 자체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술을 대할 적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을 본다. 예술에 기대지 않고, 예술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기댄다. 스스로가 예술이 되려 하지 않고, 예술가의 삶을 꿈꾼다.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는 있지만, 또 아무나 예술가라 호명되는 것은 아니기에, 다만 노래를 잘하거나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뭇사람들의 동경을 독차지하는 현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란 너무도 약하고 쉽게 변하는 존재이기에, 예술을 만드는 인간을 바라보고 기대한다면 실망 역시 필연적으로 따른다. 예술가라는 개인 뿐만 아니라 감상자로서의 개인 역시, 자신의 시야와 취향에 몰입하게 되면 예술을 겸손하게 마주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은, 인간의 감각 바깥에서 사고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러시안소설>은, '더 낫다고 평가될' 예술에 천착하는 인간의 욕망과 그 성취의 하찮음, 예술과 인간의 소통과정과 거기서 인간이 마주할 한계는 물론 예술의 근본에 대한 탐구까지 다양한 사색에서 오는 의문들을 던진다. 단순히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거대 주제 안에서 뻔한 이야기들을 내놓던 기존의 영화들과는 확실히 구별되는, 디테일한 고민들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처럼 익숙하지만 섣불리 다루기 힘든 화두를 풀어내며, 두시간 이십분이라는 장시간의 러닝타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데 실패한다. 젊은 신효(강신효 분)가 '천년의 물약'을 먹고 27년의 가사상태에 빠지기 전과 후는 마치 별개의 영화처럼 다른 호흡을 보여 준다. 초반의 한시간 이십분은 느린데도 산만한 구성 때문에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는다. 김지운의 <달콤한 인생>을 연상케 하는 수미상관식 연출은 영화의 시작과 함께 감독이 다루고자 했던 거대한 화두에 집중하게 하지만, <낭독의 발견>과 영화적 서사를 정신없이 섞어 놓아 이내 집중을 흩트려 놓는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청춘만화>나 <시>, <연애소설> 같이 영화가 아닌 매체를 제목에 차용한 영화들이 그 매체의 특성을 <러시안소설>만큼 무리하게 영화 안에 집어넣었던가? 작품성을 별개로 하더라도, 이들은 모두 그렇게 하지 않고 충분히 영화지만 시, 만화, 소설같다는 감상을 준다. <러시안소설> 속의 작가들은 자신 혹은 타인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데, 여기서 삶의 끊임없는 교차와 절묘한 포착이 예술을 만들어낸다는 메시지가 와닿지 않는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력 밸런스가 붕괴된 듯한 느낌을 주는 것도 영화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누군가는 연기를 하고 있고, 누군가는 책을 읽고 있으며, 누군가는 그냥 자신의 생활을 말한다. 그래서 누군가의 톤이 칠판을 긁는 소리처럼 극성스럽게 튀어 의도치 않은 소격효과(?)를 낸다. 이 영화만큼 소설이라는 예술 장르에 몰입되어야 하는 영화가 없을텐데, 형식에 너무 집착한 것이 역효과를 낳고 말았다. 만약 극중 언급했던 '러시안소설'의 특징, 길고 느리고 인물도 너무 많다는 점을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면 성공이다. 하지만 삶과 예술이 러시안소설의 이러한 특징과 맞닿아 있다 하더라도 영화의 재미를 반감시켜가면서까지 이러한 연출을 해야했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 한시간은 마치 다른 이야기처럼 거센 호흡으로 달려 나간다. 중년 신효(김인수 분)의 신들린 듯한 연기력은 차치하고라도, 마치 막 잠에서 깬 후 띄엄띄엄 기억나는 꿈같던 전반부의 사건들이 보기좋게 일렬로 정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환경에서 비롯된 열등감에 시달리다 자신이 동경하던 작가 김기진의 아들인 성환(경성환 분)의 이야기를 소설로 마무리하고 자신을 보필하던 재혜(이재혜 분)에 의해 27년간의 가사 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난 신효가 마주한 모든 의문들이 하나하나 풀려나가는 과정이 매우 흥미롭다. 신효가 얻은 명성도, 작품도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허나 신효가 이사실에 의문은 품을 수 있을지언정, 현실적으로 봤을 때 굳이 추적을 할 필요는 없었다. 이 추적의 과정은, 극중 인물들이 만들어낸 '러시안소설' 바깥의 <러시안소설>이라는 또다른 영화를, 예술을 만들어 냈다. 예술은 엄밀히 말하면 온전히 작가만의 것일 수 없다. 영화 속에서 가장 필요한 순간에 일어났던 기적처럼, 예술은 자신의 소유가 아닌 세상의 모든 것들을 포착하는 순간에 발생한다. 그렇기에 영화를 시작하고 마무리했던 욥기 8:14나, 어제 놓친 고기를 잡기 위해 낚시터를 떠나지 못하는 낚시꾼의 이야기가 예술의 근본적인 창조 과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극중 인물들의 시선은 신효의 소설이 아닌 신효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불완전한 인간인 신효만을 꿈꾸고 그에게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던 탓에 그들의 삶에서 채워지지 않는 빈 곳을 원죄처럼 짊어지고 갈 수 밖에 없었다. 모두 신효를 예술가로 칭송했지만, 결국 그를 누군가의 꿈을 대신 꾸어주는 존재로만 여긴 것은 그 모두였다.


신인 배우 강신효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가 언젠가의 인터뷰에서 맡고 싶었다 말한 <파수꾼>의 기태 역은, 오히려 그에게 어울리는 옷이 아닌 듯하다. <러시안소설>의 젊은 신효를 연민하지 못했듯, 그가 기태였다면 기태를 연민하기는 힘들었을 것 같다. 오히려 그는 우직한 마초의 겉모습에 검은 속내를 숨긴 듯한 이미지의 김무열이나 박성웅 라인으로 보인다. 필요한 부분에만 힘을 주고 나머지는 가볍고 자연스럽게 툭 던지듯 하는 연기는 어디서 많이 본 듯 한 기성품같기는 하지만, <러시안소설>의 전반부에서 연기자다 싶었던 인물은 신효 뿐이었다. 얼굴의 선이 가녀린 듯하면서도 굵은, 트렌디한 얼굴도 그의 장점이 될 수 있다 생각한다. 더 많이 보고, 연구하고, 예술 앞에 겸손한 배우가 되기를, 무언가의 대체재가 아니고 그 자신도 남이 대체할 수 없는 그런 배우가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