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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과 한국 팩션 영화의 미래?)


하늘 아래, 더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 어떤 번뜩이는 상상도, 이미 수십 수백세기를 거쳐 켜켜이 쌓인 역사의 지층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렇다고 우리가 시대를 잘못 타고났음을 원망하기에는, 아직 그 지층 안에 화석의 모습으로 파묻혀있는 이야기들이 서운해 할 일이다. 문화컨텐츠계에서, 픽션과 팩트의 하이브리드 개념인 '팩션' 장르가 각광받고 있는 것 역시 이러한 추세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나 세계 전역에 영향력을 보유한 문화강국인 한국-중국-일본 중, 한국은 팩션 부문에 특출난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중국은 4대문명의 발원지 중 하나인 만큼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 등이 타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고, 일본은 중국이나 한국으로부터 받은 문화적 영향을 로컬라이징하는 능력과 그것을 컨텐츠화하는 능력이 매우 탁월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한국은 역사 자체를 성역화하는 경향이 강해서, 위인전을 컨텐츠로 풀어내는 수준에 그친다는 분명한 한계점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최고다 이순신>의 경우, '이순신'이라는 역사 속 위인의 이름을 차용했다는 이유로 '위인 희화화'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물론 <장옥정, 사랑에 살다>나 곧 방영을 앞두고 있는 <기황후>와 같이 팩션을 넘어 역사를 왜곡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아직 팩션이라는 장르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환경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트렌드만을 좇다보니 생긴 해프닝이다. 팩션은 역사에 대한 열린 마인드와 과감함만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라는 커다란 흐름에 대한 철저한 공부를 통해 그 안에 자연스럽게 끼어들 수 있어야 한다. 역사왜곡 논란이 일 정도라면 <해를 품은 달>처럼 애초에 시대적 배경만 빌려오고 전혀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 스포일러 주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한국의 팩션은 <왕의 남자>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본다. 그리고 <관상>은, 정말 오랜 가뭄 끝에 만난 '볼 만한' 팩션이었다. 한국의 역사적 사건 중 선과 악이 가장 뚜렷하게 대비되는 '계유정난'은 장희빈 이야기와 더불어, 이미 컨텐츠화의 양대산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왕과 비>의 어린 단종(정태우 분)이 '수양숙부!!!!!'를 부르짖는 장면에서 눈물을 훔치지 않았던 시청자는 아마 드물 것이다. <관상>은 이 커다란 스토리라인에, 사람의 얼굴에서 운명을 읽는 '관상학'을 끼워 넣는다. 역적의 자손으로 초야에 몸을 숨기고 처남 팽헌(조정석 분), 아들 진형(이종석 분)과 함께 사는 몰락양반 김내경(송강호 분)은 스스로의 기구한 운명과 마주할 목적으로 관상학을 공부하고, 조선 최고의 관상쟁이가 된다. 조상의 죄와 입신양명의 욕구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아들을 보며 내경은 더욱 괴롭다. 타고난 운명을 거스르고 싶은 진형과 사람의 얼굴 만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의 운명을 꿰뚫어 보는 내경은 사사건건 부딪치게 된다. 그러던 중 관상보는 기생으로 이름난 연홍(김혜수 분)의 제안으로 큰 돈을 벌기 위해 진형 몰래 한양으로 가려던 내경과 팽헌보다 진형은 한발 앞서 집을 떠난다. 그렇게 진형과 헤어진 후 연홍의 기방에서 관상을 보던 내경은 기방에서 빠져나올 궁리를 하다가 김종서의 심복을 도와 관상으로 범죄자를 잡기 시작한다. 그 소문이 김종서(백윤식 분)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내경은 그의 능력을 높게 산 김종서를 보필하는 위치까지 올라가게 된다. 한편 병약한 문종(김태우 분)은 자신이 죽고 난 후 왕좌를 놓고 벌일 암투에서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여, 김종서에게 후일을 부탁하고 있는 상태. 그런 상황에서 김종서는 문종에게 내경을 데려가, 미래의 단종에게 위협이 될 만한 자들의 관상을 보게 한다. 의아하게도, 최고로 위협이 될 것이라 들은 수양대군의 관상은 개중 가장 기가 약했다. 곧 문종은 내경과 김종서에게 아들을 부탁한 채 붕어하고, 수양(이정재 분)의 진짜 얼굴을 보게 된 내경은 경악한다. 문종이 죽기 전 내경이 보았던 수양은 사실 수양의 부하였고, 진짜 수양은 반정으로 조선을 건국한 이방원의 상, 이리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의지할 곳 하나 없는 단종에게 내경과 김종서는 수양을 경계할 것을 간언하지만, 왕은 그들보다 혈육인 수양을 더 믿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내경은 과거에 합격하여 궁으로 들어온 아들 진형과 마주하게 된다. 내경은 수양 일당에게 목숨까지 위협당하며 자신과 아들의 안위와 대의 사이에서 고뇌하지만, 아들의 소신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대의를 따르기로 결심한다. 내경과 김종서의 끊임없는 설득 끝에 단종은 관상서에 관심을 보이게 되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된 내경은 단종이 읽은 관상서에 나오는 반역의 상처럼 수양의 얼굴에 점을 심어 어린 단종도 알아챌 수 있도록 만들려는 계책을 세운다. 그 계책은 성공하고, 단종은 수양을 유배보내기로 결심한다. 이때 내내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수양의 책사가 내경의 아들 진형을 해하고 이를 김종서의 짓인 것처럼 꾸며, 복수심에 불탄 팽헌이 수양을 찾아가 그를 몰아내려는 계략을 고백하도록 만든다. 결국 내경과 김종서의 모든 계획은 실패하고, 김종서는 역사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철퇴를 맞아 죽는다. 아들 진형까지 잃고,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여 목젖을 도려내다가 목소리를 잃은 팽헌을 데리고 다시 초야에 파묻힌 내경은, 바다를 바라보며 사람의 얼굴이라는 소우주에 집착한 나머지 그것을 움직이는 바람을 보지 못했던 자신을 되돌아 보며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다.


<관상>의 가장 큰 장점은, 팩션으로서 이미 있는 이야기인 '역사'에 기댈 수 있는 만큼 최대치를 기대고 있으면서 그 이야기의 흐름을 건드리지 않고 자잘한 설정만으로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배우고 보았던 계유정난을 비롯한 세조 즉위까지의 과정과 결과와 이 영화의 진행과정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다만, 여태껏 이 이야기를 컨텐츠화한 결과물들이 '승자의 역사'가 주는 느낌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에 비해, <관상>은 <왕의 남자>가 그러했듯 역사적 사건을 아무도 하지 않던 풀꽃들의 이야기로 치환해냄으로서 드라마적 효과까지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관상>의 세계관은 오십 년도 채 되지 않을 비교적 짧은 기간과 극동의 약소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여느 잘 짜여진 SF의 세계관만큼이나 치밀하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내러티브를 진행시키는 과정에서 쓸모가 없었던 인물은 비중을 막론하고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단순히 웃음만을 위해 존재한다든가, 쓸데없는 신파를 밀어넣기 위해 존재하는 인물들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이 영화의 군더더기 없음을 방증한다. 특히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는 '한가놈'으로, <관상>에서는 어둠 속의 책사로 항상 베일에 가려져 있던 인물, 한명회의 정체가 드러날 때는 전율까지 인다.


(수정)

이 이야기를 관통하는 관상학의 기반인 운명론을 바라보는 관점은 다소 애매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타고난 운명이 얼굴에 새겨진다 믿는 내경과, 운명은 개척해 나가는 것이라 믿는 진형의 대립을 보여주되, 끝까지 가치판단을 미뤄둔다. 결국 과거에 급제한 진형이 운명을 받아들이고 소소한 삶에 만족하려 하는 것과, 수양의 이마에 점을 찍어서라도 단종의 운명을 바꾸려 한 내경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처음과는 반대의 입장을 보여 준다. 중국 역사 속 반정으로 왕이 된 인물을 본따 수양의 이마에 점을 찍으면, 결국 그에게 왕이 될 운명을 부여해 준 것이 아닌가? 그러나 영화의 말미에, 모든 것을 체념하며 수양은 어찌됐든 왕이 될 운명이었다 말하는 내경은, 동시에 자신이 커다란 바람을 읽지 못했음을 한탄한다. 그가 천착했던 것은 수양이라는 인물일 뿐, 시대와 세상의 움직임은 고려하지 않았다. 제 2차 세계대전은 꼭 히틀러가 아니었어도 일어날 전쟁이었고, 새마을운동도 반드시 박정희가 하지 않았어도 일어났을 변화였다. 개인을 탐욕스럽게 집어삼켜 그 자신으로 만들어버리는 역사라는 바람, 그 바람이 흔드는대로 움직이는 파도와 같은 역사 속 걸출한 인물들, 그리고 그 파도의 움직임 안에 갇혀 있는 범인(凡人)들. 그래서 내경이 말을 잇지 못하고 바라보던 일렁이는 바다의 모습이, <관상>이 말하고 있는 운명론이었던 것이다.


현대적인 연출에 대한 시도와 집착이 다소 노골적으로 드러나 영화적이라기보다는 퓨전사극 드라마의 느낌을 많이 주기는 했지만, <관상>의 등장은 한국 영화계에서 팩션 장르가 가야할 길을 제대로 보여 주고 있다. 아무도 기록하지 않았고,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민초들의 이야기를 꾸려낸 빛나는 상상력과 이를 거대서사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치밀한 설정만으로도, 한국 팩션 영화의 교과서로 자리매김하기 아깝지 않은 영화였다.


post script. 수양대군 아 싸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