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훈의 <타짜>가 완벽에 가까운 범죄영화로 느껴졌던 것은, 화려한 출연진 때문도 있었겠지만 온전히 '한국형' 범죄물을 표방했고 또 거기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범죄영화에서 이 '한국형'이라는 수식을 가능케 하는 주축은 백윤식이었다. <범죄의 재구성>의 김선생, <타짜>의 평경장은 사기와 도박계의 '구루'같은 인물로, 특유의 변화없는 표정으로 그가 그 분야에 갖고 있는 소신과 철학을 주인공과 관객에서 전달한다. 그것들은 타짜도 아니고 사기꾼도 아닌 뭇 관객들에게, 삶으로 다가온다. 굳이 여기에 '한국형'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이유는, 누군가의 삶으로 파고들며 그것에 이입하는 '오지랖적인' 정서가 발동되는 내러티브야말로 한국 특유의 것이기 때문이다. 잘나고 멋진 주인공이 범인(凡人)은 죽었다 깨나도 못할, 스케일이 어마어마하고 멋드러진 범죄를 실행하고 돈과 힘과 미녀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다. 주인공부터가 쌈마이 중의 쌈마이,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사기와 도박 뿐인 인물이다. 그런 주인공이 범죄를 저지를 때 겪는 시련은 법과 불법의 경계가 아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어떠한 영웅적 서사도 없이 벌어지며, 외려 끝은 부귀영화 대신에 무(無)이고 원래의 쌈마이 생활로 돌아가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이게 되는 것이다. 작중인물들을 따라다니는 기구한 사연은 덤과도 같다.
<도둑들> 역시 그러한 한국적 정서의 흐름들과 궤를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가시화된, 중심을 잡아주는 '구루'의 존재가 없다. 각 분야의 전문가인 도둑들이 돈이라는 기치 아래 한 팀이 됐고, 그 안에서 이기심에 의해 발생하는 사기질이 발생한다 한들 그들은 '도둑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묵과하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그렇기에 철천지 원수지간인 뽀빠이와 마카오박이 같은 팀에서 합작범죄를 계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나마 '구루'의 존재와 유사한 것은 이러한 도둑들 간의 암묵적 합의다. 다만 이것이 무형의 가치이고 어떠한 강제도 없기 때문에 그 힘은 굉장히 약하다. 또한 이것이 순전히 도둑들만의 가치이고 합의이기 때문에 관객들은 그들의 삶에 파고들고 이입한다기 보다는 '그래, 쟤네는 도둑이니까'라는 간단한 납득 작업 밖에는 할 수 없다.
도둑들을 움직이는 '자본'이라는 동기에 은근슬쩍 사랑타령이 끼어드는 것이 이 영화의 완성도를 다소 떨어뜨렸다. 주요 내러티브 라인인 펩시-뽀빠이-마카오박 라인에 숨어있는 배신과 복수같은 갈등의 원천이 결국 돈이 아니라 사랑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돈이 있는 곳으로 움직이는 '도둑들의 가치'에 억지 합의를 하고 난 관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수 있다. 누구랑 누구랑 사랑했는데 그 누구 중의 한 명이 배신을 해서 남은 누구는 인생 포기할 만큼 망연자실해 있었는데 사실은 누구도 누구를 사랑해서 꾸민 일이고 사실 누구는 배신을 저지르지 않았다? 사실은 누구와 누구의 사랑은 뽀레버였다? 속고 속이는 도둑들끼리의 사기극에 애먼 사랑이 끼어들어 이도저도 아니게 되어버린 것이다. 또한 어떻게든 마카오박 캐릭터에 범죄의 동기를 부여하려고 애쓴 듯 보이는 어설픈 복수 내러티브 첨가까지, 범죄영화 특유의 심리전을 기대한 관객들에게는 실망을 줄 수 있는 대목이다. 기술적인 전문성이나 두뇌싸움은 이 영화에서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국판 <오션스 일레븐>을 표방했던 만큼 꽤나 장쾌한 스케일과 캣우먼같이 날렵한 바디의 전지현이 거기서 줄을 타고 건물들을 넘어다니는 것 외에는 시각적 쾌감도 미미한 편이다. 특히 김윤석이 부산에서 벽을 타며 벌이는 총격씬은 지루할 정도로 길었다. 어떻게 기관총 상대로 상처도 안나드만.. 웨이홍은 양반걸음으로 걸어가도 총알이 다 비껴가고..
화려한 캐스팅에 비해 그 활용도는 아쉬운 수준이었다. 각 분야의 전문가래봤자 정말로 전문성이 눈에 띄는 캐릭터는 전지현이나 김혜수 정도. 왜 마카오박이 홍콩의 첸과 손을 잡아야만 했는지? 언어문제라기엔 잠파노와 마카오박이 중국어가 되고, 현지 정보 문제라면 마카오박의 수첩 안에 더 많은 것들이 존재할 것 같은데. 씹던껌은 그야말로 씹던 껌처럼 버려진 캐릭터고(그러나 꿈을 사고파는 등의 한국적 정서를 아주 살짜쿵 보여 주는 인물) 앤드류는 대체 뭔지.. 잠파노가 좀 더 효율적으로 이용됐다면 재밌는 로맨스를 충분히 만들 수도 있었을 법 한데.. 그러니까, 모든 캐릭터를 주연급으로 홍보한 탓에 단순히 쪽수를 채울 목적으로 섭외한 극중 캐릭터들에게도 뭔가를 기대하게 되니 그만큼 실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외려 진짜 메인인 펩시-뽀빠이-마카오박 내러티브가 형편없는 탓에 전지현 영화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전지현의 캐릭터가 괜찮았다.
결론은 전지현이 그간 CF스타'일 뿐'이었다는 오명을 벗기고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키워줄 영화라는 것. 나머지는 솔직히 한국형 범죄물도 <오션스 일레븐>같은 세계형 범죄물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듯한 영화였지만, 전지현의 캐릭터 하나만 보고가도 충분히 볼만한 영화였다. 이 영화 <도둑들>에서 가장 도둑다웠던 인물은, 바로 예니콜 전지현이었기 때문이다.
'ARCHIVE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Memoria De Mis Putas Tristes (0) | 2012.08.08 |
---|---|
락 오브 에이지, Rock of Ages (0) | 2012.08.06 |
분노의 악령, 전율의 텔레파시, The Fury (0) | 2012.08.05 |
다크 나이트 라이즈, Dark Knight Rises (3) | 2012.07.22 |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0) | 2012.07.15 |
철암계곡의 혈투 (0) | 2012.07.15 |
내 아내의 모든 것 (1) | 2012.0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