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건 다 차치하고, 이 영화는 오리지날 조선 웨스턴의 시초로서 역사에 기어이 남고야 말 것이다. (는 나만의 상상^^이지만 성지가 되길)
작년 부천영화제에서 상영을 놓친 후 영원히 극장에서 볼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닌가 염려했던 것은 나의 기우였고 서울에는 서너군데 트는 것 같아서 내리기 전에 얼른 보러 갔다 옴.
<분라쿠>의 가이 모셰와 이 영화의 지하진 감독은 웨스턴과 갱느와르 장르 덕후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전통 웨스턴 특유의 복수극 구조와 고독한 마초 캐릭터를 그대로 차용하면서 변종 웨스턴이 그 안에서 뒤틀어놓은 각종 장치들을 시의적절하게 늘어놓는 재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철암계곡의 혈투>는 서두부터, 감옥 안에서 복수할 인물들의 리스트를 꼼꼼히 작성하는 동시에 복수의 원인을 상징하는 손상된 오브제를 수리하고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주인공의 외로운 눈이 관객을, 여태까지 보아왔던 복수극 구조의 한켠으로 데려다 놓는다. 한편, 주인공이 작성해야할 리스트가 있다면, 종이 한 면 정도는 메울 수 있는 데이터가 필요하다. 그렇게 치밀히 적어내려간 데이터를 충분히 녹여낸 악당 캐릭터들이 이 영화에는 존재한다. 맥고모자를 쓰고 다니는 말쑥한 '귀면'과 누가봐도 도축업에 종사할 것 같은 '도끼', 평범한 고물상 주인같은 '작두'는 물론이고 악당들의 사장과 그 아들까지 악당이 꽤나 많이 등장하는데도 어떤 캐릭터 하나 중복되는 사항을 갖는 인물들이 없다. '신성불가침'이란 말을 비웃듯 매불산에 단 하나 남은 절마저 피바다로 만들어버리는 그들은 그들 자체로 아귀다. 주인공은 어떠한가. 주인공 '철기'가 출옥하고 나서 대형오토바이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모습은 딱, <슬램덩크>의 '테츠오'-한국에서는 '철이'로 번역-를 떠올리게 했다. 쌍꺼풀 없이 움푹 패인 눈과 작은 입, 긴 턱과 듬성듬성 난 수염같은 외양부터 헬멧없이, 혼자 타고 다니는 대형 오토바이까지 독고다이 싸움꾼 테츠오의 분위기 그대로다. 거기에 정통 웨스턴의 카우보이나 두를법한 반다나나 웨스턴 부츠는 웃음이 나올 정도로 서부극 주인공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또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며 '철기'옆에 표기된 'Mr.noname'이라는 글씨를 읽을 때 즈음, 주인공에게는 분명 이름이 있었지만 그것이 러닝타임 내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이들이 인형놀이를 할 때 인형의 이름이 몇번이고 바뀌는 것처럼 주인공에게 부여된 익명성 또한, 이 복수극에 관객의 촉수를 더 깊게 박아넣을 수 있는 장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가는가. 언급했듯 초딩도 따라가기 어려울리가 없는 복수극 구조다. 거기에 함께 녹아있는, 자본이 움직이는 폭력에 집터와 생명까지도 철거당하는 파리목숨들의 삶은 '복수극'의 앞에 '조선 특유'라는 수식어를 기꺼이 허한다. 아귀들이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는 아수라장에서 철기의 가족이 유린당하는 풍경은 전혀 낯설지 않다. 이 영화의 좋은 점은, 애초에 그 유린하는 자들의 악마성을 '철거민들의 삶'을 통해 신파로 무마시키려거나, 정치적인 문제로 발전시키지 않으려한다는 점이다. 돈 50만원에도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삶은 이미 자본이나 정치같은 것과는 무관하지 않은가. 배경은 이제 개발의 자본과 사람들이 전부 떠나버린, 텅 빈 광산. 그 곳에 다시 찾아드는 깨끗치 못한 자본덩어리들. 한국에서 웨스턴을 찍을 수 있는 황무지로, 적격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그 김지운의 웨스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마저도 만주를 배경으로 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실로 재기발랄한 배경설정이 아닐 수 없다. 작중인물들이 액션씬을 소화할 때 그들의 몸에 모래먼지 뿐만 아니라 폐광산의 재들이 달라붙는 살풍경은 시대에 그을린 사람들의 상처를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개발이 멎고 사람들의 욕심이 빠져나간 매불산의 깊은 구덩이 바닥에 서려있는 안개, 그 안으로 '도끼'의 시체를 밀어넣는 장면은 배경의 장점을 극대화했다.
적절한 악당의 배치와, 적당히 개입하는 조력자, 의문을 품을 수 없는 복수의 역사, 신박한 설정 등등 장점이 수두룩한 이 영화는 딱히 모난 곳을 찾기 어렵다. 기껏해야 '철기'가 매번 버리고 오는 오토바이를 어떻게 매번 찾아오는가에 대한 궁금증 정도? 하지만 굳이 이 영화가 가진 모종의 모난 곳을 찾아야 한다면 모든 것이 너무 적당하다는 것이다. 더 뒤틀 가능성이 보여지기에, 지하진 감독의 차기작이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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