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는 벌판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 그러니까 한도 없이 닥쳐 오는 낯섦 때문에 그곳을 아직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때, 사람들은 그 벌판 자체에 대한 강한 경계심을 가질 뿐이며 무의식적으로 그 공간 안의 모든 것에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허허벌판에서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갑작스럽게 눈치채듯이 외로움이 찾아들 즈음에는 차마 바라보지 않으려고 했었던, 원래 그곳을 메우고 있던 것들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그 공간을 결국 자기 눈 앞의 세계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밀려드는 고독을 견디기 위해 무엇이라도 붙잡고 싶어하는 것이다. 인간이 고독을 탈피하고자 몸부림치는 것은, 차라리 본능이다. <허수아비>라는 이야기는, 바람이 몰아치는 텅 빈 도로를 다섯 시간 동안 지키고 있던 남자, 라이오넬(알 파치노 분)와 지금 막 그 빈 공간으로 뛰어 든 남자, 맥스(진 헤크만 분)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담뱃불이 없을 때 하나 남은 성냥을 기꺼이 빌려주는 것, 그리고 그 사소한 행위에 굳건히 쌓아 놓은 모든 경계를 허무는 것. 사람과 사람이 교감한다는 것은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 이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래서 내가 담배를 못 끊죠..
한번도 진지해보려 한 적 없이 되는 대로 살아왔던 라이오넬은 그저 넉살 좋은 사람으로만 보이지만, 그런 스스로의 성정 때문에 도망쳐 왔던 과거에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굴도 모르는 자신의 아이에게 가져다 줄 선물을 들고 디트로이트로 가던 길에 맥스와 동업을 하기로 결심한다. 한편 맥스는 줄곧 사람과 세상에 속아 온 탓에 계획없이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고, 모든 것에 화가 나 있다. 심사가 뒤틀릴 때마다 사람들과 부딪치려하는 그의 흉포함을 녹이는 것은 라이오넬의 유머였다. 장난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을 좋아하는 라이오넬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열이 올라 있는 맥스에게 허수아비 이야기를 한다. 까마귀가 허수아비를 무서워해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허수아비가 까마귀를 웃게 해 주었기 때문에 '봐 주고' 지나간다는 것이다. 언뜻 가벼운 농담같이 들리지만 이는 공포보다 웃음이 인간을 움직이는 더 강한 무기임을 시사하는 철학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폭력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공포심에 근거한 관계는 결코 평등할 수 없으며 더 강한 폭력이 나타났을 때 그때문에 부서지기 마련이다. 처음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실소하던 맥스는, 점차 라이오넬과 허수아비 이야기에 동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목적지를 향해 여행아닌 여행을 하면서 그들은 서로를 알기 전의 이야기들을 나누며 더 돈독한 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던 중 맥스와 라이오넬은 폭력사건에 휘말려 한달간 교도소에 갇히게 된다. 먼저 폭력을 일으킨 것은 맥스였지만, 교도소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철창 신세를 지게 된 상황에 화가 난 그는 라이오넬에게 화풀이를 한다. 그렇게 둘 사이에 금이 가는 것처럼 보이던 찰나 교도소의 실세인 죄수에게 강간당할 뻔한 라이오넬을 보고 맥스는 자신에게 라이오넬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렇게 화해한 둘은 교도소 밖으로 나와 라이오넬의 목적지였던 디트로이트를 찾는다. 별다른 계획없이 얼굴도 모르는 자신의 아이와 버리고 온 '애니'를 찾아온 라이오넬은, 그전까지 두려움에 애니에게 걸지 못했던 전화를 건다. 라이오넬도 맥스처럼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빚을 갚기에는 시간이 너무 흘러 있었고, 애니는 빚을 탕감해 주는 대신 라이오넬에게 평생 갚을 수 없는 무거운 부채를 남긴다. 라이오넬은 그 부채의 무거움을 이기지 못하고 엄청난 쇼크에 정신을 놓고 만다. 그런 라이오넬을 붙잡고 '네가 없이는 사업이고 뭐고 할 수 없다'며 부르짖는 맥스의 서글픈 절규가 조용한 병원을 울리는 장면은, 다시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 오랜 시간 허허벌판에 남겨졌을 때 라이오넬의 고독까지 가늠케 하는 것이다. 맥스는 원래 목적지인 피츠버그로 가지만, 늘 베개 밑에 두고 잘 정도로 소중히 여기던 신발 뒷축의 비상금까지 털어 왕복 표를 끊는다. 그렇게 그들이 다시 만날 것을 암시하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이 영화의 최고 명장면으로 꼽고 싶은 부분은 교도소를 나온 둘이 바에 가서 술을 마시다가 또 화를 참지 못한 맥스가 폭력을 저지르려고 할 때 질려버린 듯 돌아서는 라이오넬을 잡아 세우고 영화 속 '허수아비'처럼 우스꽝스런 춤을 추며 라이오넬을 달래던 맥스의 모습이었다. 한없이 우스운 장면이지만 어쩐지 눈물이 나오는, 그야말로 '웃음으로 눈물 닦기'가 아닌가. 고독의 벼랑 끝에서 사람이 붙잡을 것은 어찌됐든 사람인 것이다. <허수아비>는 너무나도 치밀한 내러티브와 분명한 시사점을 갖고 있었고, 그것들을 어디에 빗대어 표현하기 보다 어디서든 마주칠 수 있는 삶의 모습 그대로 직유해냄으로서 이야기에 완벽히 몰입할 수 있도록 한다. 더스틴 호프만의 <미드나잇 카우보이> 속 '랫소'와 '조 벅'의 이야기처럼, 라이오넬과 맥스의 고독했던 시작도 결국 따뜻함을 머금고 만다. 이 영화는 살아가기 힘들 정도로 추운 고독을 타고난 것이 인간일지언정, 그것을 서로의 살을 부대끼면서 극복해낼 수 있는 것도 인간이라는 어쩌면 당연한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흔한 로드무비다. 하지만 뻔하고 흔하기 때문에 더 가슴 깊은 곳으로 닿아오는 훈훈한 온기를 품을 수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ARCHIVE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Jesus Christ Superstar (4) | 2012.12.04 |
---|---|
상처 없는 성공 : 슈스케 4 (0) | 2012.11.25 |
힐링이 필요해? : <최후의 제국> (0) | 2012.11.23 |
디스 민즈 워, This Means War (0) | 2012.11.09 |
아르고, ARGO (0) | 2012.11.06 |
늑대소년 (3) | 2012.11.03 |
007 스카이폴, SKYFALL (0) | 2012.1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