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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1

007 스카이폴, SKYFALL

이런 걸 굳이 '클래식'이라 부르자 한다면, 굳이 반박할 필요성을 찾지는 못하겠다. 다만 그 클래식이란 것의 정의에 대해서라면 굳이 합의를 봐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부실하고 비약적인 내러티브, 단순 목적 달성을 위한 언피씨한 설정들이 마치 시적허용처럼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것이 클래식인가? 흥행한 시리즈물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들이라면 모조리 클래식의 범주에 털어 넣어도 좋은 것인가? 이런 것들이 '클래식'이라 불리는 수많은 영화들의 특징적인 부분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거라는 시대적 한계 때문에 용인되던 이러한 고전적 특징들이, '클래식'을 이루는 부분집합일 수는 있어도 그 자체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007 스카이폴>은 50년이나 된 시리즈물의 명성에 숟가락을 슬쩍 얹기는 했지만, 막상 차려 놓은 밥상을 들여다보니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이 생각날 정도로, 어떠한 시대적 고려도 발전도 보여주지 못했다. 이 영화를 생각보다 별로였다고 느끼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시각의 피씨함 따위에 기인하는 불편함 수준이 아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같은 헐리우드의 슈퍼히어로물이 형편없이 촌스러운 국가주의로 범벅되어 있다 한들, 단순해도 꼼꼼한 내러티브와 완벽한 설정으로 관객들을 납득시키기 때문에 적어도 러닝타임 중에 모종의 '이즘'이 튀는 경우는 드물지 않은가. 국가가 곧 정의는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오프닝 크레딧 전의 추격신은 '저게 뭐하는 짓?'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불필요한 기물파손과 인명피해들로 일관해서 도대체 국가는 무엇을 위해 007로 하여금 불필요한 희생까지 보면서 추격전을 하도록 하는지, 반감까지 절로 들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 사단을 낸 주제에 목표물을 놓치기까지! 오토바이는 참 잘 타기는 하더라만..


007시리즈는 어느덧 50년의 세월을 지나 사람으로 치면 중년이 되었고, 시리즈를 거듭할 수록 제임스 본드 역시 늙어 간다. 이런 피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하여, 범죄 액션의 고전이라는 타이틀을 방어해 나가야만 하는 상황은 물론이고 호평도 흥행도 동시에 잡아야 한다는 압박과 부담감이 필연적으로 따를 것이다. 그러나 어쩐지 내러티브적인 면에서도 '명불허전', '구관이 명관', 'oldies but goodies'를 강요당한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요원 데이터를 훔쳐낸 자를 추적하다가 같은 요원인 이브의 실수로 총에 맞아 엄청난 높이에서 물에 빠졌지만 극적으로-이 부분도,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쯤은 말해줄 수 있지 않은가!-살아난 제임스 본드는 테러로 위기에 빠진 정보국을 구하고자 하는 사명감에 불타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서 요원 테스트를 받게 된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에 그의 체력도 많이 노화되었고, 죽다 살아났으니 심신도 허약해졌을 본드는 그 테스트에서 터무니없는 성적을 기록한다. 컴퓨터 한 대만 있으면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요원 Q(벤 위쇼 분)에게는 구식이라며 은근한 비웃음마저 산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국장 M(주디 덴치 분)은 007에 대한 거의 종교적인 믿음으로 그를 요원으로 투입한다. 사실 이렇게 007이 다시 요원으로 투입되는 일련의 과정에서 그를 'old fashioned'로 취급하도록 만드는, 최첨단 장비같은 설정들이 외려 처참할 정도로 구식이었기는 하지만(Q가 007에게 볼펜 폭탄을 조롱하며 내놓은 신식 무기란게 고작 지문인식 권총과, 심지어 크기까지 큰 GPS였다!). 어쨌든 그렇게 Q의 도움으로 요원 데이터를 훔쳐낸 범인을 상하이에서 찾아낸 007은 데이터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범인을 마천루의 창문에 매달고 협박하다가 손에 힘이 달리는 바람에 그를 놓쳐 버린다. 증거 자체를 본인의 손으로 소멸시켜 버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남겨진 가방에서 마카오에서 발행된 카지노 칩을 발견, 거기에 그를 고용한 자가 있을 것이란 확신을 갖고 마카오로 이동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007이 찾아 헤매던 요원 정보의 종착점인 실바(하비에르 바르뎀 분)의 여자, 세버린(베레니스 말로히 분)을 만나게 되고 그녀에게 자신을 실바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줄 것을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나오는 왕도마뱀 우리에서의 혈투신이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렇게 실바의 본거지에 홀홀단신으로 도착한 007은 실바가 과거 정보국 요원이었으며, 국장인 M에게 품은 개인적 원한 때문에 정보국에 테러를 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홀로 적의 소굴에 들어가 궁지에 몰린 007이 영리하게도 수신기를 켜 놓은 덕에, 007은 실바를 잡아 정보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도 정보국에 들어가 M을 만나려는 실바의 계략이었지만. 007은 실바로부터 M을 지키기 위해 그녀를 데리고 007이라는 코드네임을 부여 받기 이전 제임스 본드로 살던 스카이폴 저택으로 향하게 되는데, 영화가 워낙 막가다보니 이 장면에서는 혹여나 M이 007더러 '내가 니 애미다'라고 할까봐 두려울 지경이었다. 이어서 M을 잡기 위해 스카이폴 저택으로 찾아온 실바와의 대결에 있어서도 '구관이 명관'에 대한 강박이 절절이 느껴진다. 총기라고는 사냥용 라이풀과 007 소유의 클래식 카에 달린 기관총이 전부. 스카이폴 저택의 관리인이 '가끔은 구식이 필요할 때도 있다'며 007에게 내민 나이프를 보며 오그라든 손발을 주체할 수 없었다. 힘이 모자라 팔을 발발 떨며 총을 겨누던 007이 갑자기 명사수로 변신하는 것도 그러려니 하고 보기에는 참 어이가 없는 장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건질 만했던 장면도 여기서 나온다. 스카이폴 저택이 가스통 두 개로 완전 폭발하는 신이었는데, 허허벌판에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저택이 한 번의 굉음과 함께 화염에 휩싸여 버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쾌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바는 기어코 저택 근처의 본드 가(家) 예배당으로 먼저 몸을 숨긴 M을 쫓았고, 그녀와 맞닥뜨린다. 여기서 실바는 그가 그녀에게 품었던 살의와 증오가 결국 무한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보여 준다. 너무나 믿고 사랑했던 대상이 대의를 들어 자신을 팽(烹)했을 때의 엄청난 배신감이 실바와 M을 여기까지 데려왔던 것이다. 실바가 M에게 총을 건네며 함께 죽자고 했을 때, 버려진 사람에게만 느껴지는 그 처연함이 마음을 너무나도 저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모두가 예상했듯이 종내 실바는 007이 던진 칼에 등을 맞고 죽게 되고, 이윽고 총상을 이겨 내지 못한 M의 죽음과 함께 이 모든 이야기는 일단락된다.


결국 이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007 스카이폴>은 국가주의에 희생당하는 개인인 실바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남아있는 것을 애국심이라고 하는 007을 보여 준다. 하지만 애국과 정의의 화신인 007은 또 가장 개인의 욕망에 충실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야말로 아다리가 맞지 않는다. 영화가 내내 보여주고 싶어하던 '구관이 명관'같은 것도, 충분히 그러하다고 느낄 수 있는 설정을 내놓지 못했기에 실소를 자아내게까지 한다. 이처럼 명확한 주제의식을 기대할 수 없다면 액션과 같은 볼거리로 관객을 만족시킬 수 있었어야 했는데 액션 자체도 너무 올드하고, 007 시리즈가 아닌 다른 영화에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수준이다. 이 영화의 존재가치란, 시리즈물의 50주년 기념물 정도가 아닐까, 하는 의문에 봉착하게 되었다. 


오프닝 크레딧부터 제임스 본드가 자신을 거울 속의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거나 그것을 저격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스스로가 나고 자란 스카이폴 저택을 완전 연소시켜버린 제임스 본드는 이번 시리즈를 통해 이전의 자신을 완벽히 버리고 새로운 007의 명성을 이어나가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온전히 'old fashioned'인 이야기로 '구관이 명관'을 주장할 수는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실패했다고 보여지는 이러한 시도가, 부디 다음 시리즈에서 '온고지신'의 꽃을 피울 수 있기를, 제임스 본드의 팬으로서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는 기대와 응원을 보내고 싶다.


post script. 실바 역의 하비에르 바르뎀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카리스마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이야말로 명불허전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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