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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소년

누구에게나 첫사랑에 대한 아릿한 기억이 있다. 수많은 '처음' 중에서도 유독 이 첫사랑이라는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빛깔이 퇴색되기는 커녕 더 선연하고 아름다운 색을 덧입는다. 이미 지나버린 탓에 당사자들 이외에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고 애정 이외에 어떤 감정도 끼어들 수 없는, 순수 그 자체의 기억. <늑대소년>은 우리 모두에게 있을 법한 그 시간들을 한적한 시골마을의 아늑한 풍경 위에 그려 넣는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늑대인간 관련 설정들을 몽땅 베낀 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그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퀄리티밖에 뽑아내지 못했다 해도, 이 영화를 완벽히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인 '첫사랑의 순수'를 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자체에 드는 감상은 솔직한 말로 '형편없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송중기는 '늑대소년'이라기 보다는 '동네 바보형'에 가까웠고, 말만 못했지 인간의 언어나 행동의 뉘앙스를 정확히 읽어내는 설정들은 억지스러웠다. 늑대소년은 쌓여있는 이삿짐들을 옮기지 못해 낑낑대는 소녀를 돕고, 글씨를 배우다가 느닷없이 기타를 들이대며, 훈련을 시키려는 소녀의 손등을 물어뜯어 피가 나오자 행동을 멈추고 당황하는 등의 헛웃음이 나오는 극적비약을 서슴없이 저지른다. 그가 늑대소년이 된 이유를 국가의 욕심에서 비롯된 인간병기화 시도로 설명하면서, 앞서 말한 것처럼 <트와일라잇>에 등장하는 선천적 늑대인간의 특징들을 고민없이 그대로 차용했다는 느낌 역시도 크다. 또 사회가 타자에게 가하는 폭력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굳이 이야기를 '비련'으로 끌고 가려는 면도 있다. 늑대인간의 존재를 알고 소녀의 별장으로 찾아온 군인이 계속 사살타령을 하는 것도 주인공들의 사랑을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만들고 싶어 안달난 시도로 보인다. 늑대소년에게 한톨의 연민조차 느끼지 못하는 유일한 인간인 '지태'의 만행들, 예를 들어 염소 우리 파손 사건같은 경우도, 피해자인 '장씨'가 사건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늑대소년은 빠지지 않아도 되는 수렁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그들의 사랑에 가해지는 사회적 압박은 다소 과하다 싶기까지 한 것이었다. 늑대인간의 변신 후 비주얼은 정말 보는 사람이 송중기에게 미안해질 정도였고..


하지만 이 영화의 또다른 강점으로 꼽고 싶은 것은 배우들의 연기였다. 늑대인간을 연기한 송중기의 초반부 움직임이나 먹이를 먹는 동작을 보면 늑대까지는 모르겠어도 개과(科) 동물의 움직임을 심도있게 연구했다는 티가 확연히 난다. 극적인 사회화로 그러한 모습을 초반에만 볼 수 있다는 것은 아쉽지만. 또 박보영의 츤데레 연기와 엄마 역을 맡은 장영남의 능청스러운 연기는 빈약한 내러티브를 살리는 막강한 힘이었다. 악역인 지태 역시도 인정받지 못해 분출되는 폭력성을 훌륭히 연기해내서 관객의 완벽한 몰입을 도와 분노와 연민의 양가적 감정을 동시에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송중기의 고결한 비주얼을 말도 안되는 수준으로 망가뜨린 데다가 전혀 새로울 것도 재미날 것도 없는, 조금 특이한 첫사랑 이야기인 주제에, <늑대소년>은 관객들의 눈물샘을 막고 있던 댐을 폭파시켜 버린다. 할머니가 된 소녀가 첫사랑의 추억이 담긴 장소에 손녀와 함께 누워 '어른이 되면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인다'며 자신에게 있었던, 지금은 사라진 순수의 시대를 가만히 떠올릴 때, 그녀의 감정은 오롯이 관객들의 기억에 와 닿는다. 그녀가 말했던 '보지 못했던 것'은, 사실 '보고 싶지 않던 것'이 아니었을까. 끝없이 현실 속으로 내달리며 우리 안의 순수를 잊어버려야만 하는 인간의 슬픈 운명을 바로 마주하도록 하는 데에,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기 때문에 순수를 잃지도 잊지도 않는 <늑대소년>의 이야기만한 직유는 없었다. 그렇기에, 영화의 작품성을 별개로 치더라도, <건축학개론>과 비슷한 맥락이지만 그보다 더 원초적 순수를 말하는 <늑대소년>의 장기흥행은 충분히 기대해 볼 수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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