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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1

피나, Pina


보통 우리는 '언어'가 없다면 의사소통이란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말과 글의 바깥에 있는 수많은 의사소통 행위들은 '비언어적'이라는 수식을 달고 문명의 반대편으로 강제적인 위치 이전을 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글'의 탄생 이전에는 비언어적인 일련의 행위들이 소통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독일의 무용가 피나 바우쉬는, 그처럼 몸짓으로, 춤으로 하는 의사소통의 위대함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영화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사계절의 행진은 과연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가장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는 소통 방식이었다.


인문학자들이 언어에 모든 세상과 진리를 담아낼 수 있다고 믿듯이, 화가는 그림으로, 가수는 노래로, 영화감독은 영상으로, 과학자들은 공식과 연구결과들로 그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들이란, 그렇게 자신의 표현방식에 대해 모종의 우월감을 갖고 있다. 무용가인 피나 역시 언어 이상의 표현력이 춤에 있다고 생각한다. 언어는 한번 더 상상을 요구한다는 그녀의 말이 그러한 사상을 방증한다. 그러나 피나가 생각하듯 춤이 언어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거나, 춤이 언어가 아닌 '비언어'의 범주에 든다는 해석은 틀린 것이 아닐까? 춤 역시도 언어 그 자체이며 단순히 모습이 다른 것일 뿐이라는 말이다. 애석하게도, 춤의 방면에는 문외한인 나는 그녀와 그녀의 무용단들이 두시간 남짓의 시간 동안 스크린 바깥으로 빠져나올 듯이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해낸 것들에 대해 완벽한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마치 아랍어로 된 책을 읽는 것처럼, 아니 그래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니, 독일어로 된 책을 읽는 것과 같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계를 가장 폭넓게 아우르는 의사소통행위가 몸짓일 지언정 그것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에누리 없이 모든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영화 안에서 피나의 말과 공연에 필요한 '대사'외에 사람들이 입을 벌려 말을 내뱉는 경우는 없다. 피나를 회고하는 무용단의 얼굴을 한명한명 비추는 장면에서도 말은 오로지 내레이션으로, 그것도 그들의 자국 언어로만 전달된다. 자막이 없다면, 나는 표정과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의 억양과 그들이 몸으로 하는 춤만으로 의사를 읽어내야 하고, 그렇게 이루어진 해석이 정확한 그들의 의사와 맞아 떨어진다는 보장 역시 할 수 없다. 이러한 연출은 빔벤더스의 의도가 어찌됐든 춤 역시 언어로 보아야 한다는 것, 비언어적 행위라는 말 자체가 모순적임을 생각하게 한다.


관객이 내용을 몽땅 알아 먹었든 그렇지 못했든, 그녀의 언어는 훌륭했다. 근사한 근육으로 장식된 어깨뼈와 연결된, 가늘지만 힘있어 보이는 팔들이 공간을 가를 때는 그 바람에 시간까지 역류하는 듯 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어디든 무대가 되었고, 임의로 설치된 무대 역시 지구상의 어떤 곳도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그 무대에서는 바위와 흙도 연기를 하는 듯이 보였다. 그들이 그렇게 시공간을 점한 채로 움직일 때마다 그 존재감은 가히 보는 사람을 압도하고야 마는 것이었다. 공연 중간 폴라로이드의 셔터가 눌리고 카메라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대상에 부딪치는 순간처럼, 그렇게 그들은 찰나를 붙잡고 있었고, 빔벤더스는 그것을 은근하면서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그처럼 시간 뿐만 아니라 공간까지 점하는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과 존재감, 그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한 존재가치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