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공포'라는 감정에는 분명 여러가지 모습이 있을 터다. 보통의 호러물은 인간을 끊임없이 옥죄어 오는 죽음의 다양한 양태로 공포감을 조성한다. 그것이 괴생명체나 기계가 됐든, 아니면 인간이 됐든지간에 사방으로 튀는 피의 이미지와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긴장감들을 이용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고독이 주는, 보다 근원적인 공포를 이야기한다. 영화가 절반 가량을 달려가도록 주인공 모건은 방백만으로 관객과 대화한다. 극중에서 그에게 대화할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구 전체에 퍼진 불치의 전염병이 인류를 몰살하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게 들어온 종말론의 시나리오 중 한 부분이다. 그런데 만약 살아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남지 않은 지구에 나 혼자 살아 남았다면? 그렇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죽지 못한 삶, 그것에 대한 공포다.
누구나 한번쯤 밤의 시골길, 그도 아니라면 아무도 없는 새벽녘의 귀가길을 걸어본 일이 있을 것이다. 가로등도 희미해서 달빛에 의존해 걸을 수 밖에 없는 그 시간에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으려고 옆에 동행을 두거나, 전화를 하거나, 음악이라도 듣는다. 그런데 이런 행동은 이 세상에 나 혼자 존재한다는 공포를 떨치기 위해 나 이외의 어떤 것들의 존재에 기대는 행위이지만, 동시에 나와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면서 나를 공격할 수도 있는 다른 것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도 포함하고 있다. 이 영화가 섬세한 것은, 다른 영화들과 다르게 고독이라는 근원적 공포를 주제로 삼았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감각이 닿는 범위에서만 사고할 수 있는 인간이란 존재의 한계에서 느껴지는 공포심까지도 건드렸다는 점이다. 각종 기계의 발명으로 인간의 감각과 사고의 범위가 확장되었을지언정, 그 확장된 범위 밖의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두려워하고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모건은 이 세상의 모든 인류가 사라지고 자신만이 남았다고 생각하며-반쯤 감염된 인간들은 아예 인간으로 치지도 않는다-좀비 사냥을 다니지만, 그가 있는 곳 반대편에는 인간, 혹은 더 위협적인 것들이 살아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묵과한다. 심지어는 그가 매일 사냥을 다니는 좀비의 수조차 알지 못한다.
어떤 한 부분만이 결핍된 인간은, 그것이 약점이 되어서 결핍을 채울 수 있는 제안이 함정일지라도 거기에 기꺼이 빠져버리고 만다. 자신의 것과 다른 재질로 된 말뚝을 발견한 모건은 거기서 희망을 본다. 나의 적의 적이니, 아군이라는 단순한 논리다. 마치 <프로메테우스>에서 에일리언에게 그들의 언어로 친절히 말을 건네다 목을 뽑힌 데이빗처럼, 그들에게 살해당할 운명이라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한 채로. 또 자신이 지상 최후의 인류라는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모건은 예의 '정상성'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감염된 인간들을 학살하고 다니며 '낮을 사는 남자', '전설'이라는 칭호를 얻는데, 이것이 그의 죽음에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살아있는, 인간이 모건 뿐이라면 나머지의 죽어있지만 움직이는 것들은 무엇인가? 그래서 정상은 무엇이고, 비정상은 무엇인가? 감독이 관객들에게 제공하는 생각할 여지는 과연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정상성의 오만함에까지 닿아있는 것이다. 결국 그가 여태 사냥해왔던 다른 좀비들과 같은 모양새로, 모건은 가슴에 쇠말뚝이 박힌 채로 거꾸러진다.
인간이란 과연 멸망할 수 있는 존재인가? 우리는 종종 인류가 멸망해도 바퀴벌레는 살아남을 것이라고 그 끈질긴 생명력에 감탄 혹은 조소를 날린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도 마찬가지인 것은 아닐까. 여자가 모건의 주검을 뒤로 하고 성당을 나오며 울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듯이, 인간의 존재 역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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