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CHIVE 1

인굿컴퍼니, In Good Company

사실 이 영화를 처음 봐야겠다, 고 마음먹었던 것은 2009년 당시 내 마음 속 지분율 구십구프로를 상회하던 박재범이 이 영화를 꼭 짚어서, 이 영화 속의 스칼렛 요한슨 같은 여자가 이상형이라고 했었기 때문이었다.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도 몇 년을 미루다가 어제 TV에서 해주는 것을 보고 더는 미룰 수 없겠다고 생각해서 분주히 돌아가던 채널을 멈추고 보기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그때까지 이 영화가 그저그런 헐리웃 로맨틱 코미디일 것이라는 선입견도 계속되고 있는 상태였고. 나의 관심은 오로지 스칼렛 요한슨이 대체 어떤 캐릭터를 품고 있는가, 영화 속에서 과연 어떤 연애를 하고 있을까, 정도였다. 영화가 시작될 때부터 화면 우측상단에 떠 있던, '내 남자친구는 아버지의 상사?' 따위의 거슬리는 멘트들 덕분에 대강 전개될 내용과 결말까지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 영화에 대해 기대 따위는 한톨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그런 말이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과는 달리 <인굿컴퍼니>는 가족을 먹여온 가장의 역사나 시대의 변화에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문제의식 같은 심오한 이야기들을 로맨틱 코미디의 가벼운 그릇 안에 효율적으로 담아 놓은, 그런 작품이었다.

6500만년 전, 공룡은 지구상에 뼈나 발자국 따위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렇게 지구 속 삶의 영역에서 퇴장한 존재들에 대해 묘한 향수나 동경같은 감정들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죽은 육체들은 묘비를 세운 무덤에 묻혀 해마다 살아있는 자들에게 기억되며, 멸종한 공룡들은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육신을 복원당하고, 그 자체로 상징적인 존재가 되어 기념의 대상이 되곤 하는 것이다. 인류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들 공룡과 함께 공존했던 시절은 없었음에도, 아이들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게 캐릭터화한 공룡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갖고 싶어하고, 기업가들은 자신의 회사가 공룡만큼 거대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어쩌면, 가족이나 그 가족을 짊어질 의무를 부여당한 가장의 존재가 아직까지도 삶과 죽음을 반복하고 있는 것 역시, 그러한 '기념의 역사' 중 한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처럼 과거에 끊임없이 의미부여를 해 온 인간의 역사 반대편에는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미래에 의미를 두어온 역사도 있다. '새로운 나'에 대한 갈망과 '과거의 그들'에 대한 동경이 지금도 역사가 되어가고 있는 현재의 순간들을 존재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댄은 가장의 역사에 발을 담그고 있는 동시에, '공룡'이 되기 위해 '새로운 나'로 거듭나기를 요구하는 기업의 일원이다. 그는 이처럼 거대하고 이율배반적인 역사의 증인이자 시대를 만들어가는 사람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개인으로서의 그는 너무나도 연약한 존재라 역사의 흐름이 급류를 타면 그대로 거기에 휩쓸리는 수 밖에는 없다. 나이든 댄은 좌천되고, 젊은 카터가 광고 판매부장실의 새 주인이 된다. 대대로 어린 사람이 나이든 사람의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사회는 왕정시대 정도였을텐데, 납득하기 힘들어도 시대가 그렇게 급히 변하고자 한다면 각 개인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수용할 수 밖에는 없다. 댄은 최고의 실적을 올렸어도, 오십줄에 아이가 생겨도, 딸이 뉴욕대 편입에 성공해도, 어린 상사에게 자리를 뺏긴 탓에 마냥 기쁠 수만은 없는 현실을 산다. 반면에 카터는 유례없는 초고속 승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것에는 실패한다. 사람들은 보통 행복하고 풍요로운 가족과 안정되고 활기찬 직장생활을 가진 사람을 '평범하다'고 부르곤 하는데, 이 둘은, 그리고 이 영화 속 모든 등장인물들은 모두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인 것일까?

요즘은 외려 그런 '평범한 삶'이 더 어렵고, 희소하기까지 하다. 늘 새로워야 하고, 더욱 거대해져야 한다는 시대의 요구가 개인들을 '평범함'과 같은 안정의 영역 바깥으로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현대에 와서는, 그 '평범'이라는 단어의 뜻 자체를 다시 써야하는게 아닐까? 잠깐 멈춰 쉬는 것이 도태되는 것과 등치를 이루는, 달릴 수 밖에 없는 삶. 그렇기에 휴식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적은 젊은 세대에게로 힘이 옮겨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젊다'라는 것이야말로 가장 쉽게 대체될 수 있는 장점이기에 사실상 그 힘이라는 것은 누군가를 달리게 할 수 있는, 소수의 자본가에게 집중될 수 밖에 없다. 노련하게 달릴 줄 아는 지혜를 포기하고 방전될 때만을 기다리며 끊임없이 소모당하는 젊음과 패기를 더 높이 사는 세상에서 개인은 더 확실하게 '부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부품으로서 가장 잘 기능할 수 있는 스물여섯의 카터는, 삶의 피크를 이미 맛보고 있는 걸까?


억지로 부품이 되었든, 부품을 자처하든지 간에 인간은 완전히 기계가 될 수는 없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고독이 카터로 하여금, 댄이 꾸려놓은 가정을 동경하게 만든다. 그렇게 댄의 집에서 재회하게 된 카터와 알렉스가 사랑하게 됐다는 건, 뭐 그렇고 그런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사랑은 오히려 부품과 인간 사이를 힘겹게 외줄타기하는 카터를 움직이게 하는 부차적인 요소 중 하나였다. 차가움과 따뜻함 중에서, 자연스럽게 따뜻함을 찾는 인간의 본능같은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랄까, 사랑과 같은 감정들이 유물론의 시대에 한갓 추상적인 것으로 치부될지라도 어찌됐든 인간은 그런 감정 없이는 살기 힘들다는 것이 그 둘의 흔한 러브스토리에서 다소 교훈적인 방식으로 가시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우리는 예산 감축을 위해 오랫동안 회사를 위해 충성해온 사람들을 해고하면서 '스스로 나가게 한다'는 표현을 쓰는 카터를 완곡히 나무라는 댄 역시도 그런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세상, 그것이 이기적으로 느껴지면서도 이해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세상을 산다. 카터로부터 평생 문예창작에 전념하라는 말을 듣고서도 알렉스는 아버지가 학비를 벌기 위해 집을 2차저당 잡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것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그런 세상 말이다. 테디K의 한마디에 삶 전체를 이동당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이 영화의 마무리가 되었던 것, 댄의 복직이 마치 정의처럼 묘사된 것은 못내 아쉬운 한계였지만, 한 개인이 '부품' 이전에 인간임을, 그들을 부품으로 만든 것이 누군가인지를 보여주려 했던 감독은 2004년의 영화로서 의미있는 시도를 했다는 평가를 아깝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