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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왕이 된 남자

개봉 전부터 임금 광해보다는 외려 허균에게 '킹메이커'라는 수식을 달며 조명을 집중했던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이병헌이야말로 천재배우라는 감상이 절로 드는 것이었다. 영화의 내용이 별볼일 없다한들, 이병헌의 연기만큼은 '소름이 끼쳤다'라는 말로도 부족하지 않았다. 수많은 1인 2역 영화들이 있었지만, 사실 배우들이 생김만 같은 전혀 다른 사람을 각각 연기하는 데는 무리가 없어 보이는 수준이었다.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관객이 그들의 1인 2역을 눈치채는 지점이란 의상이나 분장, 미묘한 행동과 말투의 차이에 그치는 것이었지 연기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병헌은 달랐다. 그는 얼굴의 음영을 가지고도 연기를 하고 있었다. 그가 광해를 연기할 때는 '얼굴에 그늘이 있다'는 관용어를 완벽하게 가시화하며 동시에 눈동자의 초점까지 흐트러뜨리며 허무를 손에 붙잡힐 듯이 보여주는 것이었다. 광대 하선을 연기할 때는 어떤가. 그는 얼굴을 당당히 빛에 마주하여 그림자를 없애고, 그 덕분에 눈동자는 만화 주인공처럼 빛을 머금는다. 태생부터 고결할 수 밖에 없는 임금과 농짓거리로 먹고 사는 밑바닥 인생을, 각각의 분위기를 철저히 재현해냄으로서 연기한다. 비슷한 스토리에, 1인 2역이라는 설정까지 같은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보지는 않았다만 예상되는 차이에 앞으로도 보고 싶지 않은 기분이다. 표면적으로는 1인 2역이었지만, 광해를 연기하는 하선까지 포함하면 1인 3역을 해냈다 말해도 좋을 이병헌은 실로 명불허전이었다. 하선을 왕좌에 앉힌 허균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사실상 그를 '킹메이커'라고 칭한다면 그 단어의 정의를 분명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허균은 하선을 속담 속의 '곰'처럼 부렸고, 그로 하여금 왕을 연기하도록 명령한 '왕서방'에 지나지 않았다.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 영화 전체를 완벽히 장악하던 장성기에게 기대가 컸던 탓일까, 류승룡은 이 영화에서 큰 빛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이야기의 바깥에 있는 사람이 볼 때는, 인간애보다 정치를, 그것도 논리도 없이 그냥 '정치이기 때문에'라는 근거를 들이대는 인물은 매력을 찾기 힘든 것이었다.


영화는 지극히 평범했다. 한국 사극영화는 '왕의 남자'에서 멈춰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왕의 남자' 류의, 느릿하게 움직이는 영상과 거기에 울려퍼지는 웅장한 음악은 시도때도 없이 등장하다보니 한국의 사극영화가 공유하는 모종의 공식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관객들은 이제 그런 종류의 엄숙한 분위기 조장에 반응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회의 천민인 광대가 그렇게까지 엄격한 도덕을 보여주어야만 했을까? 은 이십냥에 목숨까지 거는 인생이 왕의 목소리로 호통치는 예의 '쌀로 밥짓는 소리'들은,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은 부패한 현실을 개탄하게 한다기 보다는 하품이 나오는 것이었다. 자기의 자리에서 왕이 되겠다며 돌아선 하선이 보인 행보들도 너무 인간애에 기댄 나머지 이해가 안가는 부분도 존재했다. 그나마 이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인물은 도부장이었다. 한번도 자신의 삶 자체를 굽어 살피는 이를 만나본 적이 없기에 그를 주군으로 섬기며 목숨까지 바치려는 의지가 미련해 보이면서도 가장 처연했고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비슷한 설정의 사월이는, 그녀에게 과도한 디테일들이 부여되어서-누군가의 말을 전할 때마다 성대모사를 하는 것 같은-애처롭기는 했지만 보기에 좀 피곤한 인물이었다.


하선이 천것이었단들, 그를 좌우에서 보필하는 인물들은 그를 마음깊이 존경했으며 고개를 숙여 그 마음을 표현한다. 당연한 것 같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 존경의 마음이란 것이 우러나오는 곳은 왕과 닮은 그의 생김새이고, 그가 잠시나마 입었던 곤룡포였다. 그가 광대의 옷을 입고 있을때 그가 주워 섬기는 인간애가 존경받을 수 있었을까? 그러한 사소한 허점들은 사실 사회 속에서 생각되기 보다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을 틀어 보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 영화는 이병헌의 연기만을 남긴 채 '천편일률'의 무덤으로 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