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시저가 죽어야만 하는' 당위성, 그러니까 일종의 '정의'에 관한 이야기를 예술로 풀어낸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율리우스 시저>를, 실제 복역중인 죄수들이 교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무대에 올리게 되는 과정에서 극중인물들은 오랜 복역기간동안 좁혀지고 단순화된 그들의 세상을 그들이 연기하고 있는 옛적 로마 인물들의 것으로 완벽히 치환한다. 그들이 연습을 할 때와 직접 무대에 오를 때 각각 흑백과 컬러로 화면을 전환하여 현실과 연극의 시간에 최소한의 경계를 두지만, 죄수로서의 그들과 배우로서의 그들은 차이가 없다. 배우들은 감독으로부터 출신지의 사투리를 그대로 사용할 것을 요구받고, 연기를 하면서 <율리우스 시저> 속 인물의 감정과 배우 본인의 감정을 구분하지 못하고 격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관객들은 각자의 삶을 가진 개인이면서 타인의 삶을 연기하는 배우인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예술작품을 만끽할 때 느끼는 쾌감을 경험하게 된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으로 완전히 녹아들도록 하는 매개체로서 예술의 진가가 드러나는 지점이다. 또한 연극의 마지막 장면을 마치고 아이처럼 기뻐하는 흉악범들의 모습이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며 예술이 제공하는 가장 귀중하고 중요한 가치를 가시화한다. 한편 예술이란 간접경험만으로도 한 인간의 세상을 확장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기도 한데, 감옥이라는 보통 이상으로 한정된 공간에서 장기복역하면서 시야가 좁혀졌던 죄수들에게는 결코 기쁠 수만은 없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겨우 우물 밖의 세상을 보게 되었는데 그 밖으로 나갈 수는 없기에. 그래서 영화는 끝을 맺을 때 배우의 입을 빌어 "예술을 알고 나니 이 작은 방이 감옥이 되었구나"라고 탄식한다.
오바 츠구미의 <데스노트> 역시 '정의란 무엇인가'를 묻는 예술작품 중 하나다. 데스노트를 손에 넣고 '신세계의 신'이 되겠다며 세상을 단죄하는 야가미 라이토와 그를 막으려는 L의 대립은 단순해서 더욱 풀기 힘든 난제였다. <율리우스 시저>의 시저도 민중의 편에 서겠다는 대의로 시작했지만 결국 종신독재관을 자처하고, 반감을 사 동료들에게 암살당한다. 그리고 <율리우스 시저>를 연기하는 <시저는 죽어야 한다>의 배우들은 법과 감옥이라는 세상의 정의에 맞서 자유를 성취하고자 한다. <크레용 신짱>의 짱구 아빠가 "정의의 반대편에는 또다른 정의가 있다"고 말한 것처럼, 이 모두는 자신의 정의에 따라 행동한다. 그들을 대립시키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정의가 다른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구조의 주박 때문일 수도 있겠다. 너무 많은 정의를 용납할 수 없는 구조는 힘을 갖고 있는 자의 정의를 진리로 상정한다. 그리고, 그래서 구조는 어쩌면 필요악이다. 시저의 동료들이 시저를 죽여야만 했던 이유, 죄수들이 연기를 해야했던 이유, 라이토와 L이 각자의 정의를 내걸고 싸워야만 했던 이유가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문장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다. 하나의 구조가 부서지고, 또다른 구조가 생긴다. 이것을 세상은 진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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