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전 기차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진 제시(에단 호크 분)와 셀린느(줄리 델피 분)는 9년 후 파리에서 다시 만났다. 그때는 이미 제시에게는 가정이, 셀린느에게는 다른 애인이 생긴 후였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비포 선셋>으로 넘어가는 9년간은 제시와 셀린느 서로에게 모두 공백 아닌 공백이었지만, <비포 미드나잇>까지 오는 9년간 그들은 함께였던 듯하다. 첫 만남은 우연이어서 낭만적이었고, 두 번째 만남은 필연이어서 애잔했다면 <비포 미드나잇>까지의 9년은 <사랑과 전쟁>만큼 현실적이다. 영화는 마치 관객에게 그간의 그들을 추리하라고 요구하는 듯이 퍼즐 조각을 이야기의 곳곳에 숨겨 놓았는데, 그것들을 하나하나 발견할 때마다 아연해진다. 결국 제시는 가정을 버렸고, 셀린느와 쌍둥이 딸까지 낳은 모양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제시는 전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의 양육 문제에 신경이 곤두서있고 아들이 있는 시카고로 떠나고 싶어하는 눈치다. 그리고 이때문에 유럽에서 자신의 커리어를 지속하고 싶은 셀린느와 사사건건 부딪친다.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에서 보여준 그들의 숨쉴 틈 없이 계속되는 대화에, 로맨스 대신 현실이 끼어든다. 여전히 다정한 제시와 쿨한 셀린느가 보여주는 중년의 '꽁냥질'이 간간이 등장하지만, 대화는 언제나 예의 '시카고' 문제로 귀결된다. 여기서 그간 육아며 가사에 직업활동까지 병행하는 셀린느의 고됨이 히스테리컬하게 폭발하는데, 안타깝게도 공감보다는 짜증이 먼저 느껴진다. 그야말로 제시를 '쥐잡듯' 잡으며 시종일관 자신을 피해자로 두는 셀린느의 화법때문이다. 그 외의 부분에서도 이 영화는, 마치 성(性)대결을 조장하는 것처럼 일반화된 '남자'와 '여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사소한 풍경의 변화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만으로 한 개인의 역사와 철학의 교환, 그리고 순수한 교감을 보여주었던 전작과는 달리 <비포 미드나잇>은 여성의 희생만을 강조하며 피해의식으로 점철돼있을 뿐인 케케묵은 페미니즘 따위를 말하고 있었다. 제시가 '지금은 50년대가 아니라'고는 했지만,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은 딱 그 시절만큼 후질근한 논쟁이었다. 잘 나가다가도 갑자기 시카고 타령을 하다가는 그 여자와 잤니 마니하는 과거얘기까지 치졸하게 끄집어내지는 그들의 대화에는 그 흔한 힐링조차 없었다. 영화의 말미에야 한국 드라마에서 많이 보던 것처럼 갈라진 부부의 틈을 정으로 메우려는 제시의 노력에 결국 둘은 화해를 하게 되지만, 그들은 어쩌면 정말 다시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비포 선라이즈>와 처음 만났을 때, 어린 나이 때문만이 아니라 정말로 운명같은 사랑의 존재를 믿었었다. 그들이 보냈던, 기차에서 내려서 해가 뜰 때까지의 짧은 시간은 오히려 영원을 꿈꾸게 하는 촉매제였다. <비포 선셋>에서는, 못된 생각이더라도 그들이 결국 맺어지기를 바랐다. 그들이 있던 공간들은 천국이나 낙원 정도의 황홀한 느낌을 주었었다. 하나의 화제가 끝나면 곧바로 다른 화제로 넘어가서 차마 이야기를 끝내지 못하는, 평생을 함께 보내온 친구보다 더 잘 맞아 보이는 그들같은 관계를 생각하게 했었다. 그러나 나와 많은 관객들의 바람이 이뤄진 <비포 미드나잇>에서 우리는 그들의 대화에서 무엇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그안에서의 후줄근한 촌극들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보정할 수 있을까? '기승전페미니즘', 그것도 아주 구닥다리 페미니즘을 현실이라고 얘기해도 좋은 것일까? 항상 답이 없어도 즐거웠던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과 달리 <비포 미드나잇>은 '답도 없다'. 아마도 9년 후 쯤엔 또다른 '비포'시리즈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때는 결코, 시리즈의 연속성, 끝이 없어도 좋을 제시와 셀린느의 대화를 '망쳤다'는 감상을 적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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