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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오브 스틸, Man of Steel


DC코믹스의 팬이든 아니든, '슈퍼맨'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근육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새파란 전신 타이즈에 빨간 망토와 빨간 팬티, 빨간 장화를 착용한 초월적인 힘의 외계인이 추락하는 헬기를 들어올릴 때 세계는 전율했다. DC코믹스의 만화를 원작으로 1979년 리처드 도너가 처음 영화화한 <슈퍼맨>시리즈를 영화 <300>의 잭 스나이더가 리부트 버전으로 만들어낸 <맨 오브 스틸>은, 안타깝게도 34년 전 만큼의 어떤 것도 보여 주지 못하고 있었다. 시대에 걸맞는 최신의 CG는 그저 물량공세로 일관한 탓에 졸음이 올 정도로 지루했고, 광고로 유명한 감독이 보여주려 했던 감각적인 영상은 수퍼히어로물에 어울리지 않았다. 팀 버튼과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시리즈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마블코믹스에 비해 어둡고 염세적이며 더욱 미국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 DC코믹스의 특성이 <맨 오브 스틸>에서는 시대를 역행한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촌스럽게 연출된다. 슈퍼맨은, 결국 감독을 잘못 만난 것이었을까?


영화는 1979년의 <슈퍼맨>과 마찬가지로, 슈퍼맨의 탄생과 첫 등장으로 세계관을 설명하며 그가 지구에서 정착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리처드 도너의 <슈퍼맨>이 굵직한 사건 하나를 제시하고 그것을 해결해 나가는 방식 대신 지구에 떨어진 그가 일상처럼 행하는 선행 위주의 연출을 했다면, 잭 스나이더의 <맨 오브 스틸>은 (구)마블코믹스의 <스파이더맨>이 그러했듯 전형적인 '아버지의 원수 갚기' 내러티브를 이용한다. 크립톤에서 추방되었기에 목숨을 부지했다는 역설적 상황에 처한 '조드 장군(마이클 섀넌 분)'이 크립톤을 재건할 목적으로 지구를 침략하고, 슈퍼맨(헨리 카빌 분)이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그것을 저지한다는 설정이다. 여느 수퍼히어로물보다 더 단순할 것도 덜 단순할 것도 없는 시나리오지만, 이 안에 수십년동안 명맥을 이어온 슈퍼맨의 자리가 없었다는 것이 문제다. 포마드를 발라 정갈히 빗어넘긴 머리에 두꺼운 알을 끼운 뿔테 안경, 빈틈없이 수트를 입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헐렁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클라크 켄트는 <맨 오브 스틸>에 없다. 그 뿐 아니라, 두 부모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능력과 정체를 숨기고 인간의 역사에 최대한 개입하지 않으려 조심하던 클라크 켄트/슈퍼맨 역시도 <맨 오브 스틸>에는 없다. 어린 시절 사람들 앞에서 능력을 사용했다가 괴물 취급을 당했던 분노만을 품고 있는 클라크 켄트가 있을 뿐이다. 또한 로이스(에이미 애덤스 분)에게 반해서 동화처럼 밤하늘을 날던 수퍼맨은 수염과 가슴털이 덥수룩한 마초 아저씨가 되어 있었다. '칼 엘'에게 '클라크 켄트'라는 이름을 지어 준 그의 두 번째 아버지 조나단 켄트(케빈 코스트너 분)의 죽음 역시도 거의 자살로 보일 정도로 석연치 않은 구석이다. <맨 오브 스틸>의 슈퍼맨은 움직일 때마다 건물을 작살내고, 자동차를 전복시키며, 땅을 부순다. 그래서 악당의 목을 비틀어야 하는 순간에도 생명을 해할 수 없다는 신념과의 충돌에 괴로워하던 그의 모습은 의아하게까지 느껴진다. IMAX 3D로 최선의 자리에서 관람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아이언맨 3>나 <스타트렉 : 다크니스>에서 받았던 압도감과 감동보다는 '아... 그만 좀 부수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유와 정의의 수호자인 강한 미국' 클리셰는, 조드 장군 일당이 슈퍼맨을 넘기지 않으면 지구를 파괴하겠다고 하자 순순히 슈퍼맨을 내놓는 미군에게 로이스까지 내놓을 것을 요구하자 돌연 쎈 척을 하는, 실소가 새어나오게 하는 장면에서 절정을 찍는다. 그런 대사가, 과연 목적 달성에 필요한 것이었을까? 게다가 속사포랩같이 쏘아 붙이는 줌인-줌아웃의 카메라 워크나 필요 이상으로 정물적 이미지에 천착한 연출도 불필요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IMAX 3D로 봐도 이지경이니, 3D로 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슈퍼맨의 팬이라면, 더더욱 보지 말길 권한다. 하지만 헨리 카빌은 타이즈 바깥으로 삐져나오는 가슴털에도 불구하고, 잘생겼다. 러셀 크로우도 여전히 멋지다. 하지만 그들을 보러 갈 목적이더라도 이 영화는 보지 않았으면 한다. 내 평생 IMAX 3D를 보면서 영상에 실망한 적은 처음에다가 3D 안경을 쓰고 졸았던 적도 처음이었다. <프로메테우스>만큼 진지하고 어둡지만, 또 나름의 철학은 찾아보기 어려운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