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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1

레미제라블, Les Miserables

장발장은 불쌍하지 않다. 그는 인생의 모든 시간을 '착한 아이 컴플렉스'로 자신을 학대해 왔을 뿐이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빵도, 은촛대도 아니라 그저 완벽하지 못하여 자신의 도움을 절실히 원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가 불쌍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자신이 자비를 베풀 수 있는 누군가를 찾으면, 자기 몸에 죄를 덧씌워서라도 그를 구원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죄의 댓가를 치르기 위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장발장이라는 개인은 소멸된 채 24601로 불려야만 한다. 그리고 그처럼 자신이 타인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는 사실은 장발장에게 노역보다 더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장발장의 황혼기 내내 자신에게 기대올 것이라고 믿었던, 그래서 죽는 날까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줄 것이라고 믿었던 코제트가 마리우스에게 기대려하자 괴로움을 느낀다. 결국 장발장은 자신에게 기대오는 존재들에게 마주 기댔을 뿐이다. 그런 탓에 자신의 범죄들이 이타적 행위였다는 장발장의 변명은 그저 핑계로만 들린다. 그에게는 오로지 그 방법밖에는 없었을까?


그럼에도 장발장은 불쌍하다. 정말로 그에게는 그 방법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추구하는 이타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그가 바라보는 불쌍한 사람들은 돈이 들지 않는 조그만 배려만으로는 고통을 덜 수 없었다. 은식기를 훔쳐 달아나던 장발장을 용서한 신부도, 음식과 따뜻한 침대와 은식기가 없었다면, 신의 이름을 빌어 그를 구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불쌍한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 구원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그는 구원에 필요한 것들을 훔치고, 구원의 시간으을 벌기 위해서 법망을 피해 달아나는 삶을 살아야만 했다. 장발장의 인생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선택의 순간들은 오로지 두 갈래의 길만을 보여 주었다. 평범하고 이기적인 삶과, 죄를 업고 끊임없이 도주하는 이타적인 삶이라는 두 개의 감옥 중 장발장은 늘 후자를 택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 갇힌 죄수보다는 신념에 갇힌 죄수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신념은 <레미제라블>의 자베르와 <26년>의 마실장을 살게 했지만, 동시에 죽게도 만들었다.


우리는 돈이 있어야만 구원받는 삶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돈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하는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아이에게 먹일 분유가 없어서 그것을 몰래 훔치다 붙잡히는 현대판 장발장들은 순순히 자신의 죄를 시인한다. 사실 수많은 장발장들이 어깨에 무겁게 짊어진 죄들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구원의 댓가를 돈으로 받으려는 세상이었는데도 말이다. 1789년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혁명을 일으켰다. 그날의 정신이 오늘날까지 희미하게나마 전승되어, 지금 우리에게 허락된 자유와 혁명의 가능성이라는 형태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역사상 모든 혁명들의 가치가 우리 삶에 조금씩 묻어있기는 해도 결과만 놓고 봤을 때는 전부 실패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혁명이란 정말 시기상조일까. 장발장과 혁명군들은 결국 죽은 후에야 슬픔이 아닌 환희로 찬 혁명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마치 꿈처럼 그려지는 성공한 혁명의 시대는 억울함의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뮤지컬을 그대로 재현한 탓에 영화의 러닝타임이 심히 긴 축에 속하고, 그래서 다소 늘어지는 느낌이 들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리우스를 결국 혁명전선에 서게 만든 원인 등의 몇몇 부분은 매끄럽지도 섬세하지도 않은 방식으로 표현된다. 조금은 빈약해 보이는 스케일을 메꾸는 CG 역시도 2012년의 것이라기엔 다소 어색한 느낌이 크다. 하지만 세계 4대 뮤지컬을 영화로 재현해낸 배우들은 대단했다. 특히 판틴을 분한 앤 해서웨이와 에포닌 역의 사만다 바크스는, 영화 전체로 보았을 때 적은 비중이었지만 엄청난 존재감을 뽐냈다. 사기꾼 테나르디에 부부를 연기한 사챠 바론 코헨과 헬레나 본햄 카터는 자칫 너무 묵직해 질 수 있었던 영화의 무게감을 코믹함으로 조절해내는 감초 역할을 했다. 25주년 기념 뮤지컬을 보면 뮤지컬 배우보다 이들의 노래 실력이 모자라다는 느낌을 받을 수는 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온몸으로 연기를 하는 상태에서 노래를 한다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이고, 그래서 영화 <레미제라블>은 영화라는 장르 나름의 장점을 분명히 갖는다. 그래서 <레미제라블>은 이야기가 갖고 있는 모종의 시의성과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였던 영화다. 혁명 후 26년, 왕정복고를 맞은 프랑스와 민주화운동 후 26년, 똑같이 왕정복고를 맞게 된 한국의 상황이 오버랩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26년>보다는 차라리 <레미제라블>이 뭉클했던 이유는, 잠자던 파리의 시민들이 시가와 바리케이트에 얼룩진 피를 닦으며 다시 혁명을 꿈꾸는 장면 때문이었다. 또다른 장발장들을 다시 마주칠 일이 없는 그날은, 과연 와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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