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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누군가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그 자체로 비극이다. 한 명이 죽었든 천 명이 죽었든 그 비극이 담고 있는 슬픔의 무게는 같다. 아우슈비츠에서 4백만명이 죽었다고 해서 6.25 전쟁에서 죽은 3만명의 희생이 그보다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듯, 4천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26년 전의 그 사건 역시 규모는 세계 굴지(?)의 잔혹극보다 작을지 몰라도 결코 잊어서는 안될 비극임에는 분명하다.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태동이었던 광주 민주화 운동을 끔찍한 살육으로 얼룩지게 만든 '그 사람'을 단죄하는 상상으로부터 출발한 <26년>은, 그 태생적 논리로 민주주의의 가치를 끊임없이 역설한다. 사건만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충분히 분노를 자아낼 수 있지만, 작중인물들이 말하는 대사의 형식을 빌어 직접적으로 '행동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26년>이 보여주는 행동의 정당성과 폭력의 비정당성은 대립한다. 그리고 그 대립의 각 축은 절대 타협할 수 없다. 같은 사건을 다루었던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신부마저 총을 잡게 되는 것처럼, 정의로 상정된 쪽의 폭력은 마치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정당한 것으로 미화된다. 그런데, 죽는 날까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용서할 생각이 없는 자를 죽인다면, 과연 비극은 끝나는 것일까? 26년간 이어져 온 슬픔의 고리가 '그 사람'의 죽음 하나로 끊어질 수 있을까? 계엄군과 민간인들의 손에 피를 묻힌 '그 사람'을 완벽하게 단죄하는 방식이란, 상당히 철학적인 난제다. '그 사람' 하나의 목숨을 뺏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하려는 것은 순간적이고 오락적인 처벌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 후의 허무함은 감당할 수 있는 것일까? (개인적으로는 삼엄한 경호 제공이나 화려한 생활부터 어떻게든 뺏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영화는 지나칠 정도로 비극을 더 비극적으로 보이게 만들려고 애쓴다. 자꾸 어긋나는 계획과 총탄들은 시원함보다는 찜찜함을 남긴다. 멈춰있던 대중이 움직이기를 요구하는데 효과적인 장치로서의 비극적인 면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영화적으로는 그렇게 슬프기를 요구하고 울 때까지 질질 끌수록 다소 지루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의의는 분명하다. 바로보기 괴롭더라도 마주해야만 하는 아픈 기억을 되살려 내려는 의도는 주효했고, 모종의 계몽적, 혹은 교육적 책임을 다한 영화라는 것은 이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사건을 전달하거나 되새김질할 수 있게 만드는 역할을 <26년>이 수행했다 하더라도, 이 영화를 보고 관객들의 머릿속에 재현될 민주화 운동은 그저 단순한 비극에 불과하다는 점이 한계로 남는다. 영화가 관객들의 분노를 이끌어낼 것을 노리고 했던 연출들은 시의성이 없었다면 여느 픽션에서도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이고 순간적인 분노만을 느끼게 할 뿐이다. 공격당하는 민주주의가 아닌, 공격당하는 광주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미묘하게 어긋난 핀트 탓에 <26년>은 그저 그런 팩션 영화에 멈춰있을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