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CHIVE 1

파파로티

A4 크기의 리플렛 속 이제훈의 촉촉한 눈을 보았을 때, 중3 때 학교에서 단체관람했던 <살인의 추억>의 폴라로이드 사진 속 박해일이 오버랩됐다. 박해일 이후로 그렇게 그렁그렁한 눈은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기필코 이 영화를 극장에서 관람시키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애잔하게까지 느껴지는, 한껏 격앙되고 멋부린 영화 소개말에 코웃음이 나올 정도로 영화가 뻔한데다 그닥일 것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민 끝에 결국 나를 극장으로 향하게 했던 것은, 온전히 이제훈의 그 젖은 눈이었다.


영화는 딱 생각만큼 별로였다. 동서고금의 감동적 스토리는 다 갖다 붙인 모양새다. 재능있는 건달의 성공기, 사고로 인해 꿈을 잃은 이가 제자에게 자신의 꿈을 투영한다는 감동 스토리, 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학교를 일으켜야 한다는 교장의 절박한 이야기 등등 소름돋게 진부한 이야기들이 한데 섞였다. 영화가 중반을 지나며 극장 안에서는 이미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니 말 다했다. 다행인 것은 다들 너무나도 많이 보고 겪어온 이야기들을 비비는 과정이 나름 조화롭고 무난해서 거부감까지는 들지 않았다는 것 정도일까. 이제훈의 어설픈 연기(개인적으로 이제훈은 박해일처럼 싸이코적인 면이 강한 연기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했고, 한석규의 이전같지 않은 오버연기는 그다지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식상하기 그지 없는 해피엔딩은, 그럼에도 모두가 바랐을 것이었고, 여타의 선택지가 없었다는 점에서 적절하기는 했다. 적어도 극장을 나오는 관객들에게 해바라기의 노래를 흥얼거리도록 만들었으니까.


이제훈이라는 주목받는 배우의 선택에는 다소 아쉬움이 느껴진다. 입대하기 전의 다작 중 하나이고, 대중적 노선의 필모그래피 역시 필요했다는 점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갖고 있는 컬트적 매력을 전혀 살리지 못한 영화를 고른 것이 흥행과 별개로 팬으로서의 안타까움이 든달까. <분노의 윤리학> 정도가, 그에게는 도전이었을까? 똑같이 입대 전 다작한 현빈이 흥행을 뒷전으로 한 침착한 분위기의 멜로를 많이 찍어 대중배우 이미지에 연기파라는 수식을 얹었다면, 이미 연기파인 이제훈은 그 반대였던 것 같다. <파수꾼>에서 그에게 느꼈던 강렬함을, 그의 전역 이후 꼭 다시 보고 싶다.


post script. 영화를 보는 내내 사토 다케루 주연의 <BECK>이 떠올랐다. 천상의 목소리를 아예 묵음과 듣는 이들의 표정으로 묘사해 버린 그 기지가 영화의 격을 확실히 살렸다고 느꼈었는데, <파파로티>에서도 주인공의 목소리를 묘사하는 연출에 있어서 그와 같이 새로운 도전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ARCHIVE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 위드 러브, To Rome With Love  (0) 2013.04.04
전설의 주먹  (0) 2013.04.03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0) 2013.04.01
웃는 남자, L'homme qui rit  (0) 2013.03.28
지슬  (0) 2013.03.27
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  (0) 2013.03.23
링컨, Lincoln  (0) 2013.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