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극장에서 처음 <전설의 주먹> 광고를 보았을 때, 작정하고 까자면 깔 것은 수두룩빽빽해도 그럴 의욕이 생기지 않을, 딱히 할 말이 없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기어이 뚜껑을 열어 보고 나온 후에도 그 생각 자체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 이유는 살짝 변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유치하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 스토리는 그덕에 의외의 흡입력을 자랑했고, 극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격투기 장면은 뒤로 갈수록 지루하기는 해도 볼거리로서의 본분은 잃지 않았다. 기대치가 바닥이어서였는지,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감상을 얻었지만 '딱히 할 말이 없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는 이유는, 이 영화가 보고 돌아서면 잊어버릴 수 있는 철저한 오락영화의 존재 의의를 지켜냈기 때문이다.
내러티브는 거의 5공 시절 수준의 논리로 진행된다. 대표적으로 상훈(유준상 분)이 결국 '전설의 주먹'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전을 결심'당하는' 부분에서, 그의 고교 동창이자 상사 손진호(정웅인 분)의 비리를 폭로하려는 신문사 국장과의 밀회 장면은 참혹할 정도다. '트위터', '좌파', '빨갱이'같은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단어를 굳이, 그것도 악인의 입에서 내뱉어지게 함으로서 꾀했던 효과는 전혀 세련되지 못해 거부감이 든다. 딱 <가문의 영광> 내지는 <두사부일체> 수준의 현실 비판은 너무나 거칠고 원초적인 연출 탓에 몰입 대신 소격 효과를 준다는 느낌이다. 게다가 감독 본인은 도저히 자를 곳을 찾지 못했다고 하지만, 두시간 반의 러닝타임에는 불필요한 부분들이 상당히 많다. 팽당한 국정원 직원 서강국(성지루 분)은 감초 역할을 넘어서는 반복된 등장으로 웃음의 강도를 약화시킨다. 덕규(황정민 분)의 딸 임수빈(지우 분)을 왕따시킨 불량학생들이 덕규에게 덤비는 설정이 과연 필요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기파 배우 황정민을 믿고 보자면 볼 수도 있다. 실력있는 배우들이 각 배역에 적절히 녹아들어 수많은 허점들을 상쇄하는 듯 보이지만, 이 영화의 치명적 미스캐스팅이 존재하니 그것은 이요원이다. 왜, 대체 왜 그녀였을까? 대사만 놓고 보자면, 이요원이 맡은 시청률 제조기 홍PD 역은 높은 시청률이 지상 최대의 과업으로 쿨하고 시크한 성격과 프로그램에 대한 책임감이 돋보이며, 국장과의 독대에서도 전혀 기죽거나 밀리지 않는 전형적인 '골드미스' 느낌의 캐릭터다. 그저 중간만 갔어도 매력적일 수 있는 이 홍PD라는 캐릭터가 이요원의 발연기 탓에 시종일관 빈정거림을 일삼는 악역으로 전락한다.
<영웅본색>은 강호에 의리가 사라졌음을 역설하면서도 그 안에서 남자들의 끈끈한 의리를 살려냈었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의리나 우정이라는 가치를 거부하는 것인지, 강우석이 너무 대뜸 '이것이 의리니 받아들여' 식으로 던졌기 때문인지, 진한 감동을 의도했을 <전설의 주먹>의 결말은 관객석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의리'라는 단어의 진지함에 오그라들어하는 풍토가 작금의 현실에 분명 존재하며 김보성 류의 유치함으로 희화화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어설픈 결말에 터져나온 관객들의 웃음은 필시 영화의 탓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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