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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2

이름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가볍게 붙였다가, 뗌과 동시에 동그랗게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나서는 미소짓듯이 입꼬리를 좌우로 당기고 혀끝을 가볍게 앞니의 뒤에 붙여야 한다. 부러 목을 울려 소리를 내지 않더라도 가끔 이렇게 나는 너의 이름을 입안에 가볍게 굴려볼 때가 있다. 삶이 급하게도 내 숨통을 조여오는 것도 모자라 날씨까지 말을 안들어 너를 보지 않고는 못견디겠다 싶었던 저녁에 나는 그렇게 여러번 네 이름을 가만히, 가만히 불렀었다.


결국에 너를 당분간 보지 않겠다는 다짐을 깨고 너와 만나고 돌아오는 길은 늘 그렇듯 극치감 후에 오는 것 같은 깊은 허무함. 고3때 남자친구와 대학에 가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나면 더 그애의 생각만 나는 것처럼, 나는 괜한 애틋함을 만들어서 너를 붙잡고 있는 줄도 모르겠다. 옛날에 읽었던 애정소설들을 일부러 꺼내 읽는데, 주인공이 애인에게 보내는 편지 첫머리에 코가 아프도록 찡해졌다. 편지의 흔한 시작. 애인을 부르는 호칭과, 자기의 이름을 옆에 적어 누가 보내는지를 알리는. 아저씨, 저 누구에요. 이름이라는 것이 어쩌면 그렇게 애틋해질까. 전화벨이 울리는 순간, 그 너머의 상대를 궁금해하며 느끼는 설렘이 사라진 지금은 누군가와 전화를 할 때 가끔은 발신번호가 뜨지 않았으면 싶었던 적이 있다. 누구야, 나 누구야 라고 말했던 적이 얼마나 오래 되었을까. 이름을 부르고, 내 이름을 말했을 때 수화기 저편에서부터 전해지는 경계의 해제와 안도감이 그리워졌다. 그래서 너와 전화로 연결될 적에는, 받기 전부터 혹은 받고 나서 기척만 들어도 나인줄 알아주는 것보다, 나라는 기대를 오십프로 정도 갖고 있다가 내가 수없이 입안에서 굴렸던 네 이름을 부르고 그 후에 내 이름을 말하고 나서야 부드럽게 풀어지는 숨소리에 같이 떠오는 네 미소를 그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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