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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2

만화방에서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 144:15


필터청소를 하지 않아 덜마른 빨래 냄새를 풍기는 에어컨 바람이 코에 끼얹혀질 즈음 나는 내 앞에 앉은, 무협소설을 보며 초코파이 세 개로 허기를 달래는 등산복 아저씨의 방귀 2연타에 귀를 혹사시켜야만 했다. 만화방 안의 눅눅한 공기가 온 몸을 마취하고 내게 온전히 남은 감각이라곤 시각 뿐이었다. 나는 처음 이 공간 안으로 발을 들였을 때보다 더한 집중력으로 책장을 넘겼다. 네가 요즘 읽고 있는 <우주형제>. 기어이 달 표면을 밟고 만 히비토가 크레타에 떨어지고 난 후 본 하늘, 그 '지옥 속의 천국'에서 너도 조금 눈물이 났을까.


나는 히비토보다는, 차라리 뭇타와 비슷했다. 여러 갈래의 길 앞에서는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이나 가장 어려운 길로 가고자 했고, 무언가를 고를 때는 뭇타가 악기 가운데 트럼펫을 골라 배운 것처럼 항상 가장 반짝이는 것으로 골랐다. 그게 나 스스로를 가장 멋져 보이게 하는 선택들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반오십해를 살아온 지금도 뭇타와 같은 모습이었다. 언제나 내 뒤를 따라올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추월당하고, 정작 나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런 자괴감에 종종 부닥쳤던 나는 그때마다 '치열한 삶'에 대한 고민에 휩싸이곤 했다. 엊그제 우연히 보았던 '쇼미더머니'에서 후니훈이 '나는 한 번이라도 치열하게 살아왔는가'를 되뇌이며 눈가를 적신 것처럼. 그러나 그런 고민은 늘 잠시였다. 내 유전자에는 '치열함'이라곤 없다는 것을, 오늘에야 인정한다. 사람들이 삶의 치열함을 이야기하며 자신을 채찍질하는 분위기에 동화됐을 뿐, 내 무의식은 사실 그것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왜 고생을 사서 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치열함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치열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내 인생의 최종목표인 한량도 태생적으로 금수저를 물고 나오는 성골이 아닐 바에야, 치열한 삶의 끝자락에만 허락된다. 그 치열함은 결국 나에겐 지루함이고 권태이며 피로가 아닌가. 그러나 얼마전 썼던 글에서처럼, 나는 그같이 '1'로서 살기를 갈구하는 삶보다 '19'같은 삶을 살기로 한 것으로 편안해질 수 있었다. 박태원의 『적멸』의 낡은 레인코트를 입은 사나이처럼 '0'으로, '0으로' 한없이 침잠하다가는 내 한참 앞에서 빛나고 있는 너를 놓칠 것이 자명했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그것이 어제 내게 또 한번 와닿았던 것은, <우주형제> 속 뭇타가 옥상에 올라가 담배처럼 비눗방울을 불면서 이내 터져버리는 그 구(球)들을 바라보며 '나는 이제 사라지는구나'라고 읊조렸던 장면을 보면서였다. 사라진다는 것, 그 소멸의 허무함이 뉴스나 영화에서 보는 사실적인 죽음의 한 씬들보다 그 2차원의 한 면에서 더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어서 본, 너의 이름을 한 다른 천재의 이야기 속에서는, 네 옆을 묵묵히 걷고 있는 나의 다른 모습을 보았다. 마치 내 입에서 나오는 언어들이 그의 입을 빌려 활자가 된 것처럼 그는 자신을 좋아하게 되도록, 그런 길로 걷겠다고 했다. 여태 내 길이 모자랐던 것은 네가 없어서였다. 그렇게 책장을 덮고 일어서 집으로 걷는 길에 보인 교회의 전광판에서도 너를 읽었다. 적과 녹으로 떠다니는 시편의 글귀를, 너를 내 신으로 섬기면 복이 올 것이라는 구절로 뇌내에서 바꿔 읽으며 나는 한결 편안해졌다. 내 길이란 것에 믿음이 생겼다. 내가 입만 산 인간이란 것은 이제 익숙하다. 헌데 입만 산게 어때서? 이빨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찬찬히 동네를 걷다보니, 13년간 살아온 동네 곳곳이 모두 나의 언어로 풀어져갔다. 이빨이 별건가? 이찌노세가 그랬듯이, 주변을 품고 내 것으로 만든 후에 밖으로 꺼내놓는 작업의 일환 아니던가? 건반은 고양이도 두드릴 수 있지만, 뭔가를 표현해낼 수 있는 종자는 따로 있다. 키보드나 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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