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이 힘'일 때도 있지만, '모르는 것이 약'일 때도 있다. 영화 <신세계>에서, '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덫이 된다. 대형기업으로 성장해 가는 폭력 조직 '골드문'을 장악할 목적으로 경찰 측의 강과장(최민식 분)이 골드문에 심어 놓은 이자성(이정재 분)은 조직의 보스 송두철(이경영 분)의 죽음이라는 일련의 목표를 달성한 후에도 골드문에 잔류할 것을 강요당한다. 이미 조직에 몸담으면서 골드문의 실세 정청(황정민 분)의 오른팔이 되어 숱한 범죄를 저지르고 괴로워하던 자성은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싶다. 그러나 그는 경찰과 골드문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둘 중 어느 곳에서든 그의 정체가 발각됐을 때 자성은 제거 대상 1호가 된다. 송두철의 사망 이후 혼란스러워진 조직의 새 보스 자리를 놓고 이중구(박성웅 분)과 정청이 물밑 전쟁을 펼칠 때에도 강과장은 '앎'의 맹점을 이용해서 두 명의 조직 실세를 이간질시킨다. 아무리 이중구와 사이가 좋지 않아도 같은 조직원을 배신할 수 없다 말하는 정청과 밀회사진을 수감 중인 이중구에게 보내고, 그 자리에서 어떤 말들이 오갔든 밀회라는 사실 자체를 알게 된 이중구는 정청을 제거하려 한다. 강과장은 이중구와 정청이 '수술중'인 틈을 타 실세에서 밀려났던 원로를 골드문의 '바지 회장'으로 앉히고 이자성을 실세로 만들려 하는데, 이때도 역시 의도적 폭로를 통해 자성을 덫으로 몬다. 조직 원로에게 자성이 사실은 골드문에 잠입시킨 비밀경찰이었음을 알려서 사실을 쥐고 있는 강과장의 뜻대로 모든 것이 돌아가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제거된 정청이 자성의 비밀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간의 정 때문에 그것을 묵인하고 있음을 안 자성은 결국 자신의 '신세계'를 위한 특단의 결정을 내리게 된다.
<신세계>는 <무간도>의 내러티브를 부분적으로 차용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데, <무간도>를 의도적으로 탈피하려는 노력이 보이지만 신통치 않다. '이자성'이라는 주인공의 이름에서도 <영웅본색>류의 느와르에 대한 오마주같지만, '느와르'라는 간지나는 장르보다는 그냥 '조폭물'이라 부르는게 합당해 보인다. 비밀의 존재와 그것을 안다는 사실이 가하는 폭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보다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는가를 이미지화한 듯한 느낌이 더 크다. <조폭 마누라>나 <가문의 영광> 시리즈 때 진즉 끝났어야 할 폭력만 존재하는 영화가 재현된 것 같다. 극중 인물들이 자신의 악행에 느끼는 가책이나 고뇌가 너무 단순화됐고, 그 비중조차 적은 탓에 인간미는 <신세계>에 부재하고, 대책없이 폭력의 연쇄만 이어진다. 던져 놓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해결되지 않은 수수께끼들도 너무 많다. 자성은 정청과의 정에 이끌렸던 것일까, 아니면 이중간첩이었을까? 차라리 윌리엄 모나한처럼 <무간도>를 리메이크한다 했으면 좀 나았을까? 왜 이 영화의 제목이 '신세계'가 되어야 했나? 필요 이상의 욕설과 어색한 시쳇말이 난무하는 대사처리는 머리가 어지러워질 정도의 언어 폭력에 노출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영화 <신세계>는, 결국 '신세계'를 보여주지 못한 채 끝이 난다. 똑같은 '조폭물'의 모습이면서도 <범죄와의 전쟁>과는 질적으로 사뭇 다른 느낌이다. 말 그대로 '나쁜 놈들 전성시대'를 표방했지만 여기의 나쁜 놈들이 아주 맛이 간 놈들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특히 폭력배 최형배(하정우 분)를 등에 업은 '반달이' 최익현(최민식 분)이 깨진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는 우울한 눈이 <범죄와의 전쟁>이 <신세계>와 차별되는 분명한 지점을 보여주고 있다. 흥행은 기대된다. 하지만 이미 뚜껑을 열어 본 이상, 영화에 대해 (개인적으로)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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