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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 Snowpiercer


실망이든 감동이든, 딱 기대의 무게만큼 돌아오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이고, 그만큼의 감동으로 보상받을 수도 있다. <설국열차>가 어땠느냐 한다면, 전자에 가깝다. <설국열차>는 'SF'라는 특정 장르의 모든 고전적 설정들을 그대로 차용한다. 위기에 빠진 지구, 생존을 위해 '노아의 방주' 격인 '설국열차'에 탑승한 '선택받은 사람'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초현실적 갈등 상황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이러한 설정들이 <설국열차>의 완성도에 의문을 품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SF라는 장르를 교과서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옮겨낸 것은 '덕후'들이 '팔 만한' 가치를 느낄 수 있는, 매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거기에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의 야만성과 그 안에서의  인간성 상실'이라는 커다란 주제의식 안에서 풀어가는 이야기는 대중적인 시의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설국열차>의 연출과 전개방식은 너무나도 1차원적인 것이었다. 굳이 우리가 이 영화를 선택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비슷한 문제의식과 설정을 지닌 영화는 이미 도처에 즐비하다. 백번 양보해서, '설국열차'라는 환상의 공간만을 기대하고 영화관을 찾았다 하더라도, 어떠한 컬트적인 만족감도 주지 못한 채 노골적이기만 한 연출이 실망을 가중시킨다.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해 살포한 냉각제로 꽁꽁 얼어붙은 지구의 유일한 생존자들을 태운 '설국열차'의 주인이자 절대권력자 '윌포드(에드 해리스 분)'이 지키고자 하는 '엔진'은, '구조' 그 자체를 직유한다. 설국열차를 굴러가게 하는 모든 원리와 권력이 엔진에 집중되어 있다.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분)와 꼬리칸의 사람들은 엔진이, 윌포드가 있는 머리칸으로 가기 위해 겹겹이 닫혀있는 문들을 돌파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혁명이라 부른다. 목숨을 바쳐가면서 자신들의 정의를 위해 관문을 하나하나 통과하는 장면들은, 역사 속의 혁명들 뿐만 아니라 더 높은 곳에 자신을 위치시키기 위해 사다리를 대는 현재의 우리 모습과도 오버랩된다. 꼬리칸의 사람들은 윌포드에게 복종하고, 머리칸의 사람들은 윌포드를 종교처럼 신봉한다. 윌포드를 제외한 설국열차의 모든 탑승객들은, '엔진'이 아닌 '윌포드'가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윌포드는 영화의 말미까지 주인공인 커티스들이 맞서야 할 절대악, 엔진의 유일한 지배자처럼 그려지지만, 윌포드 역시도 결과적으로는 엔진의 한 부품에 지나지 않았다. '설국열차'라는, 모종의 '이즘'을 투영하고 있는 거대기계는 그것을 발명해낸 인간의 피를 필요로 하는 유기체,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윌포드가 엔진칸까지 도착한 커티스에게 엔진을 '물려받기'를 요구하는 장면은, 그가 그저 엔진의 관리자에 불과했음을 시사한다. 커티스가 그의 제안에 잠시 이성을 뺏기는 장면은 인간의 나약함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주요한 씬이었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주었던, 그렇지만 설국열차의 꼬리칸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던 그 작은 불씨 몇 조각이, 커티스의 우여곡절을 돕고, 설국열차라는 구조를 붕괴시키며, 설국열차 밖의 새로운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 젖힌다.


<설국열차>의 몇몇 장면들은 문제의식과 내러티브를 훌륭히 받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연출들이 '스타 감독' 봉준호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이었다. 봉준호는, 굳이 말하자면 소설가같은 감독이다. 누구도 그에게 김지운처럼 스타일리쉬한 그림을 만들라고도, 박찬욱처럼 단어 몇 개만으로 튼튼한 구조의 시를 써내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가 잘하는 것은, <살인의 추억>이나 <마더> 류의, 화려하지는 않아도 엄청난 흡인력의 오리지널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그의 최고 역작이라고 생각하는 <마더> 속 김혜자의 수미상관 댄스씬(?)이나, 관광버스 안에서 허벅지에 독을 찔러넣은 채 춤을 추는 모습을 역광으로 비춰낸 장면 등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명연출이었다. 그러나 그가 <설국열차>에서 보여준 연출들은, 타란티노를 방불케 할 정도로 피비린내가 끼치는 장면들을 만들어냈지만, 완급조절이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의미없이 오락용으로 혈투씬을 넣었다기엔 <설국열차>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너무나도 노골적이었고, 그랬기에 그러한 장면들은 분량을 과도하게 차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 탓에 영화는, 오히려 박진감 넘쳐야 할 혈투씬 때문에 늘어지고, 지루해진다. 그저 충격만을 주기 위해 삽입한 장면들, 이를테면 꼬리칸 사람들에게 식량으로 제공되는 프로틴바가 사실은 바퀴벌레로 만들어진 것이었다거나, 옆구리에 칼을 맞고도 엔진칸까지 커티스들을 쫓아오는 정체불명의 남자며, 문이 하나하나 열릴 때마다 커티스들을 공격하는 이들의 정체 등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었다. 또한 이 영화 주인공들의 낮은 생존률(!)도 단순한 충격요법 이상의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는 설정이었다. 거기에 빨리감기 하고 싶은 욕구를 참을 수 없게 만드는 슬로우모션의 남용 때문에 이 영화를 감상하는데 적지 않은 인내심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설국열차>는 딱 그의 전작, <괴물>을 벗어나지 못하는 영화였다. <퍼시픽 림>이 만듦새와 별개로 '카이주'나 '예거' 등의 설정으로 덕후들을 홀렸다면, <괴물>에는 그처럼 '덕후용 설정'이라 부를만한 것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설국열차> 역시, 설정이 간단한 자막으로 표현되거나, 내러티브와의 연계 없이 덜렁 제공되는 탓에 설정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환경 오염 비판'과 '자본주의 비판'이라는 문제의식 또한 크게 바뀐 것이 없다. 가족애나 인류애같은 끈적한 감정으로 위기를 극복하려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적어도 그가 <괴물>이라는 SF물에 손을 댔으면, 그보다는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기를 응당 기대하게 되지 않을까.


<설국열차>가 하반기 최고의 기대작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현재 개봉 5일차, 평가의 호불호는 극심하게 갈리고 있다. 나는 철저히 불호의 입장이다. 한국의 영화감독이 헐리우드 유수의 배우들과 작업했다는 것만으로 응원해 주자고 한다면 심형래의 애국마케팅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일 뿐이다. 시의성을 지닌 문제의식을 다루고 있다 해서, 영화의 만듦새를 지적하는 쪽을 '교조적'이라 비판한다면, 너무나도 나이브한 생각이 아닐까. 영화를 비롯한 예술작품들이 전부 문제의식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담고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뿐더러, 막말로 내가 핸드폰 카메라를 들고 자본주의를 은유하겠답시고 노숙자와 카페 흡연실 안에서 떠드는 사람들을 오버랩시켜 촬영한다 한들, 그것을 '사회 반영 예술'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모든 예술작품의 안에서 사회적인 문제의식이 가시화되지 않고, 예술가 본인이 자신 안에서 영감을 받았다 한다고 해서 그 작품에 사회성이 결여됐다고 말할 수는, 단언컨대 '없다'. 무인도에서 자란 인간이라도 '무인도'라는 공간, 사회의 영향을 받는다. 우리가 문학시간에 시를 분석한다고 하자. 이육사의 <청포도> 속 청포도는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전자든 후자든 그 해석을 완벽히 '사회적'이라거나, 완벽히 '개인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예술비평에, 내(內)와 외(外)의 경계를 두는 것 자체가 굉장히 1차원적이지 않은가? 비평계에서 '내외 외의 경계를 허물자'는 사조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이미 작품에 안팎이 존재한다는 사고 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리고 <설국열차>는, '밖'을 '안'의 방식으로 표현하는데 실패한 작품일 뿐이다. 어떤 고매한 사상을 품고 있더라도, 못 만든 영화를 옹호해 줄 이유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