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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 위험한 열정, Passion


동경(憧憬)의 역사란, 가히 인간의 기원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동경에서 파생되는 감정이 그저 열등감일지라도, 그것은 언제나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힘을 제공해 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동경하는 대상에게도 동경의 대상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동경'이라는 감정은, 과격하게는 대상에 대한 신격화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좀 더 거기에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자신이 동경의 대상이 되는 누군가는? 모두의 동경을 한 몸에 받는 위치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모종의 인정욕망을 품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누군가의 동경의 대상이 되는 인물에게도 동경의 대상은 존재할 것이다. 이처럼 동경은 수많은 감정들을 근원이 되며, 마치 먹이사슬과도 같지만, 이 사슬의 맨 꼭대기는 구름에 가려져 있는 듯 보이지 않아 누가 '끝판왕'인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무엇처럼 되고 싶다'는 동경은 욕심으로 변질되고, 결국은 가상의 '무엇'을 만들어 내고야 만다. 거장 브라이언 드 팔마의 최신작 <패션 : 위험한 열정>은 '동경'이라는 단어 뒤에 숨겨져 있던 복잡한 감정의 교차와 관계를 조명하면서 '카메라'라는 최신 기술이 보급된 현대의 '관음'코드까지 함께 녹여낸다. 누군가를 바라보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을 동경의 행위가 광기를 띨 정도로 과도해질 때, '본다'는 행위는 인간을 옥죄는 올가미가 되는 것이다. 보편적으로 '동경'에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 순수한 애정을 파국으로 치닫게 만드는 과감한 감독의 시도는, '본다'의 현대적 의미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패션 : 위험한 열정> 속 두 주인공 크리스틴(레이첼 맥아담스 분)과 이사벨(누미 라파스 분)이 특히 남들에게 '보여지는 것'을 판매하는 광고업에 종사한다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이미 업계에서 성공한 크리스틴을 동경하는 이사벨은, 휴대폰의 뒷면에 카메라, '눈'이 달려 있다는 사실에 착안해서 광고 아이디어를 낸다. 청바지 뒷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어, 엉덩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핸드폰 카메라로 역관음한다는 발상은 의외의 호평을 얻고, 크리스틴은 그것을 자신의 아이디어인 것처럼 상부에 보고한다. 동경하던 대상의 추악한 모습을 보게 된 이사벨은 광고가 발표되기 전에 전세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유투브에 자신이 촬영한 영상을 올리는 선수를 친다. 이사벨의 곁에서 항상 그녀를 바라보던 비서 다니(카롤리네 헤어퍼스 분)의 도움으로 점차 크리스틴의 비리를 알게된 이사벨은 크리스틴과 어색한 사이가 되지만, 크리스틴은 자신을 향한 동경의 시선이 변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그러던 중 크리스틴의 애인인 어셔(프랭크 위터 분)와 출장지에서 바람을 피운 이사벨은 당시 찍었던 동영상을 크리스틴에게 들키게 되고, 그 동영상은 고스란히 이사벨의 약점이 된다. 크리스틴은 이사벨을 몰래 도와주던 다니가 레즈비언이라는 점을 악용, CCTV 앞에서 마치 다니가 이사벨을 성희롱하는 것처럼 꾸며 그 또한 다니의 약점으로 삼는다. 애인과 섹스할 때마저 자신을 꼭 닮은 가면을 씌우고, 자신을 우위에 둔 플레이만을 고집할만큼 자기애가 강한, 자신안의 또다른 자신을 동경하던 크리스틴은 그렇게 간단한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거기에 심각한 스트레스에 약까지 먹게 된 이사벨의 분노하는 영상이 CCTV에 찍힌 채 크리스틴에 의해 회사 동료들에게 공개되고 이사벨은 그 자리에서 극도의 모멸감을 느낀다. 그러던 중 이사벨이 평소 보고 싶어했던 발레를 보러간 밤, 크리스틴은 잔인하게 살해당한다. 이사벨은 가장 먼저 의심의 대상이 되지만, 신경쇠약 때문에 먹었던 약의 환각작용 때문인지 그녀는 홀린 듯 죄를 고백한다. 그러나 그날 밤 발레를 보러 가서 직원에게 '목격된' 그녀는 쉽게 혐의를 벗고, 모든 의심은 크리스틴이 살해당한 날 취한 채로 그녀의 집에 찾아간 어셔에게로 돌아간다. 이사벨은 이제 크리스틴과 관계된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듯하지만, 이사벨을 동경하던 다니의 시선이 그녀를 집요하게 쫓고 있었다. 크리스틴을 죽인 이사벨을 바라보고 있던 다니의 눈은 그 자체로 권력이 되어 이사벨을 또다시 시선의 먹이사슬 밑바닥으로 끌어 내린다. 이 사슬이 주는 피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다니를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을 보유하거나, 다니의 눈을 이세상에서 아예 없애버리는 것, 둘 뿐. 결국 다니의 목을 조르고 마는 이사벨. 하지만, 이사벨은 정말 다니의 목을 졸랐을까?


줄거리를 간단하게 요약할 수 없을 만큼 <패션 : 위험한 열정> 속의 은유와 장치들은 방대한 양을 자랑한다. '동경'이 '시선'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작품 속 인물들의 복잡한 관계를 통해 전제하면서, 카메라의 구도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조절하여 다분히 주관적인 '시선'이 '진실'을 어떻게 왜곡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화면의 조도가 변화할 때는 '비밀'을 만들어내는 시선에 대해 이야기한다. 관객의 허를 찌르듯이 한 씬의 막바지에 갑작스레 클로즈업되는 다양한 모습의 카메라 렌즈들, '눈들'은, 감독의 작품 중 <분노의 악령>에서 시선의 높이로 권력관계를 비유했던 연출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또한 영화가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크리스틴이 살해될 때, 화면이 이분할되며 이사벨의 눈, 괴로워하는 크리스틴, 발레 공연을 번갈아가며 보여주면서 시선이 닿는 곳과 닿지 않는 곳에서 자의적으로 편집되는 기억과 진실을 시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제는 더이상 '감시하는 권력'을 이야기할 때 '판옵티콘' 같은 철지난 예를 들지 않아도 될 정도로, <패션 : 위험한 열정>은 관련 이슈에 대한 훌륭한 '경각제'다. 더욱더 많아지고, 더욱더 깊숙한 곳까지 침투한 시선은 이미 복잡한 현대사회의 절대필요악이 된지 오래다. 비단 휴대폰에 달린 카메라 뿐만 아니라, 골목에는 CCTV를, 차량에는 블랙박스를 설치한다. 그런데, 이처럼 전능한 시선의 보편적 소유는 과연 진실에 가까워지는 길일까? 사람의 눈은 시선을 통해 얻은 정보를 자의적으로 편집하여 진실 대신 비밀과 거짓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래서 개발된 기계의 눈은 진실을 보다 객관적으로 담는 동시에, 사람의 눈만 존재할 때는 있었던 시선의 사각지대를 없애 버렸다. 그리고, 그래서 현대를 사는 우리는 '진실'이라는 미명 하에 닥쳐오는 시선에 서서히 목이 졸려가는 기분, 코너에 몰리는 기분을 느끼며 이사벨처럼 괴로워진다. 우리는 무엇을 우선해야 할까? 과연 절충점은 없는 것일까? 여느 난제들처럼, 어느 것도 이 영화 안에서 결론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패션 : 위험한 열정>을 통해 잠깐 시선의 사각지대를 벗어나 '시선'을 역관음할 틈을 얻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