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리 모터스, Holy Motors
삶을 이야기하는 많은 콘텐츠들이 그것을 묘사할 적에, '무대 위의 연극'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아주 적확한 표현이기도 하지만, 그 적확함 탓에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클리셰가 되어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비유이기도 하다. '무대'나 '연극'에 삶을 빗댔을 때, 이는 다분히 중의적이다. 삶의 주체가 다양한 역할에 따라 옷을 바꿔 입는 배우와 같다는 뜻이기도 하고, 무대 위의 극이 화려하건 그렇지 않건 타인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반드시 뒤따르며, 항상 고독과 피로가 동반된다는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다. 레오 까락스는 <홀리 모터스>를 통해 이러한 비유들의 정도를 극단으로 끌어올려 하나의 우화를 만들어 냈다. '알렉스(드니라방 분)'의 하루를 시작부터 끝까지 집요하게 추적하며, '삶은 연극이고 그 삶을 사는 인간은 배우다'라는 별로 놀라울 것 없는 명제를 다시 한 번 영상으로 비유함으로서 관객들에게 그에 대한 재동의를 이끌어 낼 뿐만 아니라, 연극과 같은 삶에서 오는 피로감에 대해 적극적인 공감을 이끌어 낸 것이다.
이야기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극장으로부터 시작된다. 알렉스는 마치 신체의 일부처럼 그의 중지에 끼워져 있는 열쇠로 문을 열고 극장의 관객석으로 들어선다. 이는 삶이 어떤 무대를 펼쳐 보이든 그 무대 위에 배우로서 서는 일은 결국 스스로의 선택이라는 사실과 타인의 삶에 대해서도 적극적 관객이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알렉스의 하루는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떠나는 순간부터 아홉 개의 스케줄을 모두 끝내고 난 뒤에야 끝을 맺게 된다. 단순히 장소를 바꿔가며 배역에 따라 다른 분장을 하고 연기하는 한 배우의 삶이 이 영화의 전부지만, 그가 하는 모든 행위들이 인간의 삶에 대한 비유다. 영화 <도쿄!>에서 레오 까락스가 연출했던 <광인>의 주인공도 알렉스의 한 모습으로서 여기에 등장한다. 당시 <광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쏟아졌었지만, 감독의 의도는 결국 수년 뒤의 작품에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 거지, 광인, 모션캡쳐 배우, 살인범 등 다양한 역을 소화해내는 알렉스의 분장 밑 원래 얼굴에서 그를 둘러싼 사람들과 관객들은 깊은 피로감을 읽는다. 자신이 속해 있는 다양한 관계의 수만큼 다양한 얼굴을 가져야만 하는 현대인들은 피곤하지만 그 다중성을 체화하면서 원래의 자신을 잊어간다. 들뢰즈가 말했던 것처럼, 모든 관계 속의 자신을 지워 나가다 보면 결국 남는 것은 무엇도 없는 것이다. 다음 스케줄로 이동하며 잠시 쉬고 있는 알렉스 앞에 의문의 남자가 나타나 왜 이 일을 시작하게 됐는지, 언제 그만둘 것인지 등을 질문한다. 알렉스는, '처음에는 연기를 잘 하고 싶었다'고 답한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직면한 관계가 원활하게 지속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만두는 시기에 대해서는 즉답을 피한다. 그 때는 모두가 알고 있듯이, 죽고 난 후가 될 것이다. 이미 사회라는 그물 안에 살고 있는 한 가면을 벗을 수 있는 장소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가족의 앞에서는? 우리는 탄생과 동시에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도 일정한 가면을 부여받는다. 진짜 '나'라는 것의 존재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이다. 그래서 모든 스케줄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남은, 집으로 돌아가 쉬는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 집 열쇠를 받은 알렉스의 집에는 사람이 아닌 오랑우탄들이 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어떤 말과 몸짓으로도, 우리는 마치 오랑우탄과 대화하듯이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가 없다. 영화의 맨처음, 알렉스가 들어선 영화관에서 관객석에 앉아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졸거나 딴청을 피우고 있었던 것과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벗어날 수 없는 고독과, 삶을 연기하는 피로를 원죄처럼 짊어질 수 밖에는 없다. 알렉스의 하루가 말해주듯이 여러 명의 '나'로 살아간다는 것은 차라리 스스로를 죽이고 싶어질 만큼 힘든 벌이다. 알렉스의 모든 스케줄이 끝나고 셀린(에디뜨 스꼽 분)은 '홀리 모터스'에 차를 둔 채 표정 없는 가면을 쓰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녀의 얼굴을 덮은 가면의 매끄러운 표면 위로 모든 표정과 연기들이 미끄러진다. 영원히 찾을 수 없을 진짜 '나'의 모습은, 오히려 그 가면과 가장 닮아 있지 않을까?
영원히 진짜 자신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고정된 사실인 이상, 삶은 숭고하면서도 낭만적인 고군분투다. 이 영화의 제목이자 감독이 제시한 삶의 근원이 '홀리' 모터스인 까닭도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삶이라는 연극이 끝나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배우라는 짐을 내려 놓을 수 있다. 그때까지, 우리는 피로와 고독에서 눈을 돌리고 맡은 배역에 오롯이 집중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