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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스파이어, FoxFire : Confessions of a Girl Gang

최고급잉여 2013. 8. 2. 16:48


'소녀'와 '핑크'는,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필수불가결의 관계다. 좀 연한 베이비핑크는 밀짚모자를 쓰고 레이스와 시폰에 휩싸여 꽃을 꺾는 소녀의 이미지를, 핫핑크는 단을 접어올린 교복치마를 입고 풍선껌을 씹으며 키티 케이스로 감싼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소녀를 연상시킨다. <폭스파이어>는 소녀들의 이야기를 자처하며, 차라리 붉은 색이라 불러도 좋을만치 강렬한 핫핑크를 사용해 관객들을 교란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풋풋한 소녀도 선연한 핑크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탁한 무채색의 분위기가 애써 빛을 발하려는 핑크색 소녀들을 덮어버린다.


남성 중심, 자본 중심, 어른 중심의 사회에서 어리고 경제력이 없는 여자, 소녀들은 가장 약한 이들이다. 하지만 <폭스파이어>의 소녀들은 그렇게 약한 채로 머무르기를 거부한다. 그렇게 'FOXFIRE'의 이름 아래 도원결의한 그녀들은 회색빛 세상을 상대로 핫핑크색의 외침을 던진다. 하지만 폭스파이어의 저항은 실로 우스운 것들이었다. 잘 봐줘야 위트있다고 할 수 있을 장난들은 점점 도를 지나쳐 폭력과 범죄가 되어 버린다. 모종의 고민이나 사상이 결여된 단순한 분노의 표출, 그것은 오히려 폭스파이어를 결성케 했던 강인한 의지마저 퇴색시키고 만 것이다. 의미없는 난봉질도 잠시, 법정에 회부된 그녀들은 리더인 '렉스(레이븐 애덤슨 분)'를 감옥에 뺏기게 된다. 이 때 이 영화의 화자이자 주인공 중 한 명인 '매디(케이티 코시니 분)'가 하는 대사가 가관이다. '왜 어린 소녀 한 명을 그렇게 두려워 했을까?' 그런데, 과연 그들이 렉스를, 폭스파이어를 두려워 했을까? <폭스파이어>를 지배하고 있는 정서는 이와 같은 '자의식과잉'이다. 부조리한 사회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이상의 영웅심리에 젖은 주인공들은 오히려 정말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의 사상까지 의심스러운 것으로 바꿔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출소한 렉스를 필두로 정말 '갱'이 되어버린 소녀들은 꽃뱀짓으로 연명하며, 그것이 세상에 저항하는 방식이라고 굳게 믿는다. 소녀들은 궁핍한 재정을 타개할 목적으로 백만장자를 납치해 돈을 얻을 생각을 하지만, 그녀들의 믿음은 백만장자의 믿음을 이기지 못했다. 믿음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가진 힘의 문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너무나도 불쾌하다.


백만장자 납치극이 실패로 돌아가고 뿔뿔이 흩어진 폭스파이어의 일원들은 각자 부조리한 사회에 적응해가고 나름의 행복을 찾는다. 하지만 사건 이후로 행방불명이 된 리더 렉스의 소식만은 묘연하다. 그러던 중 '리타(마들렌 비손 분)'와 우연히 재회한 매디는 신문에 실린, 렉스로 추정되는 여자의 사진을 보게 된다. 그녀는 카스트로 혁명에 참가하고 있었다. 영화의 이 마지막 장면조차 실소를 머금게 한다. 그저 반골기질에, 공격적인 성향만 있으면 혁명이 가능한가? 이는 소위 '빨갱이'라 불려왔던 수많은 투사들에게, 얼마나 모욕적인가? <폭스파이어>는, 사회에 대한 어떤 고민도, 타집단에 대한 이해도 없이 그저 무모하기만 한 소녀들과 완벽히 닮아 있는 영화다. 이런 식으로 세상을 바꾼다면, 어느 누가 납득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떤 세상을 기대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