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1

천사와 악마

최고급잉여 2012. 10. 15. 21:48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7629


딱 일 년 전에, 슈스케 3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이제는 '슈퍼스타 K'라는 프로그램과 불가분의 관계가 되어 버린 '악마의 편집'이 흥미 유발 수준을 넘어 출연자 개개인을 일주일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도록' 만들고 있던 상황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케이블 방송 특유의 재기발랄한 편집이 슈스케 시즌 1의 성공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었고, 더불어 이 성공은 한동안 침체 상태였던 오디션 프로그램 포맷의 재기의 신호탄을 터뜨림과 동시에 케이블 방송의 가능성에 대해 시사했다. 잘하고 좋아하는 분야의 전문가로 성장하는 대신 '적당한 소양을 갖춘 회사원'을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꿈'이라는 단어가 점점 비현실의 영역으로 침잠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재미있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등장이란 2002년 월드컵의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되살리는 힘이었고, 동시에 스포츠 경기를 보며 일상의 피로를 마취하려는 맥락과도 맞물려 참으로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의 슈스케 시즌 2부터 예의 '악마의 편집'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프로그램 종영 후 돌아보았을 때, 시즌 2까지는 아직 '악마의 편집'은 단순한 흥미 유발용 편집 기술로 '왼손은 거드는' 정도였다고 생각한다. 시즌 1에 비해 출연자 개개인의 캐릭터가 분명했고, 억지로 만들어내지 않아도 충분히 이야기가 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평생 먹을 욕을 다 먹었던 김그림의 경우도 편집진이 억지로 이기적인 캐릭터를 만들어 준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뭔가를 잘못했다기 보다는 경쟁을 붙여 놓은 단체 생활에서 충분히 있을 법한 행동들을 했을 뿐이지만, 이미 무한경쟁구도를 내면화한 대중은 그것의 폭력성을 지적하는 대신에 사태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점이 억울할 수는 있어도 편집진이 시청자더러 '얘 욕해 주세요'라고 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살아 남기 위해 다소 얄미워 보일 수 있는 행동을 했던 김그림 뿐만 아니라, 눈치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출연자들 역시 각종 이유로 욕을 먹었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쩌란 말이냐 트위스트 추면서.. 그런 맥락에서 이때까지만 해도, 악마는 편집진이 아니라 외려 시청자였다. 각자 존재감의 차이는 있었어도, 캐릭터나 잘하는 분야가 겹치지 않았고, 환풍기 수리공 허각의 우승으로 결말까지 훈훈하게 마무리한 슈스케 시즌 2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일은 결코 의외의 사건은 아니었다.


슈스케 3부터, 드디어 '악마'의 것이라고 부를 법한 편집 기술이 시전되기 시작했다. 교묘한 편집기술로 60초 후를 기대하게 했지만 그 후에는 '낚였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아무런 사건도 없었다. 슈스케 시즌 2의 슈퍼위크에서 김그림이 희대의 악역으로 프로그램의 관심도에 기여했던 것이 과연 악마의 과실이었는지, 제작진은 시즌 3에서 신지수에게 그 악역을 일임했다. 마치 '얘는 이기주의자니까 이번 주에는 얘를 씹어라'고 요구하는 듯이, 제작진은 문제가 됐던 화면들을 시청자에게 반복학습시켰다. 사실 따로 떼어 놓고 보았을 때 신지수의 발언을 문제삼기는 어려워 보였다. 외려 나머지 조원들처럼 눈치만 보며 울고 발만 동동 굴렀다가는 죽도 밥도 안될 상황이 아니었던가. 제작진의 의도대로 방송이 끝나자마자 포털 사이트의 메인에 신지수의 인성을 성토하는 기사들이 내걸리고 커뮤니티에 모인 사람들은 신지수를 욕했다. 시즌 1이 포맷의 성공이었다면, 시즌 2는 캐릭터의 성공이었고, 그 성공의 정도가 엄청났기 때문에 자극적이거나 뚜렷한 캐릭터를 지닌 출연자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즌 3에서는 캐릭터를 억지로라도 만들어 부여하고 싶었을 것이다. 시즌 3의 또다른 대표적인 희생양은 크리스였다. 언어 문제 따위로 단체생활 초반에 겉도는 경향이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방송에서 그는 여자를 '밝히는' 조울증 환자 그 자체였다. 그가 잠시 휴식을 위해 밖으로 나와 있을 때를 제작진은 놓치지 않고 그가 부적응자라는 근거를 만들어 냈다. 솔직히 실력으로는 결코 생방송 무대에 서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예리밴드가 탑 11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도 예의 망나니류의 캐릭터가 필요했던 상황 때문에, 방송의 재미상 와일드카드의 개념으로 내놓지는 않았을까. <타짜> 식으로 얘기하자면, 시즌 3에서는 '구라'로 만든 캐릭터가 오래 갔고, '자연빵'으로 인기가 높았던 캐릭터-이를테면 훈남 4인방-들은 오래가지 못했다. 없던 성격을 만들려니, 그 수많은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리가 없다.


현재 방영중인 슈스케 시즌 4는, 어떤 의미로는 숭고하게까지 느껴진다. 안그래도 있었던 지난 시즌들에서 개개인의 실력보다 불우한 가정사같은 사연들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들이 무색하도록 시청자들의 눈물콧물을 빼려는 작태가, 내가 보고 있는 것이 과연 인간극장인지 슈스케인지를 고민하도록 만들 정도였다. 제작진이 어이없게도 '천사'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또 방송이 되는 3차 예선까지 올라온 사람들은 실력자들을 밀어내고 올라온 것이 아닌가 싶을 수준으로, 확실히 화제성만이 돋보였다. 예선 방영시 강용석과 조앤 편집으로 2주를 우려먹은 것은 확실히 충격적이었다. 게다가 아예 생방송 출연자를 염두에 두고 슈퍼위크 참가자들을 구성한 듯, 몇몇 화제의 인물을 제외하고는 카메라 지분율이 TV 출연에 의의를 둘 정도의 것도 못 되었다. 예선 통과자들이 슈퍼위크로 갈 때의 설정과 슈퍼위크에서 생방송 합격자를 추려내는 설정은 많은 시청자들을 아연하게 만들었다. 그정도면 심사고 뭐고, 대놓고 제작진과 시청자의 입맛에 맞는, 실력은 무난하지만 화제성은 어마어마한 캐릭터들만 추리겠다는 심산이다. 슈퍼위크의 라이벌 미션에서 이번 시즌 최고의 화제성을 탑재한 김정환과 유승우, 로이킴과 정준영이 맞붙었을 때, 시청자 중 과연 누가 긴장감을 느꼈을까? 그들 외의 다른 출연자들의 미션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숫제 무마하듯이 건너 뛰어 버린 탓에 한회도 빠지지 않고 본방사수를 했지만 이해할 수 없는-허니브라운의 한찬별이 왜 빠지게 됐는지, 마요네즈는 대체 어디로 갔는고?-전개도 벌어진다. 빨리 생방송 무대로 넘어가고 싶어하는 제작진의 속내가 그대로 전달된다. 애초에 모든 상황이 각본이라는 느낌이었기 때문에 이전 시즌에서 소외효과를 일으켰던 현실과 각본 사이의 균열은 보이지 않는다. 이쯤되니, 제작진이 벌여놓은 이 모든 것이 숭고해진다. 오로지 화제성만 바라보며 최고의 '쇼'를 만들겠다는 강한 집념으로 초반의 재미없는 '천사'에서 사상 최강의 '악마'로 급전환해버린 것이다. 시청자들은 슈퍼스타 K에서 오디션 프로그램의 긴장감을 읽기 힘들어진 대신 10주간 구미에 맞는 콘서트를 감상하게 됐다. 여태까지의 위악이 아닌,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양심이고 영혼이고 죄다 팔아버린 진짜 악마를 보는 기분이다. 어이없을 정도의 미숙한 편집이나 설정도 생방송 무대에서 더는 보기 힘들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실력 이외의 화제성으로 꾸려낸 탑 12는 이제 화제성 대신 실력-보편적으로 듣기 좋은 음악이 가진 대중성의 비율이 가장 큰-으로만 회자될 것이다. 화제는 개개인의 무대와 그 주의 탈락자가 되고, 욕은 입맛에 안 맞는 심사를 한 심사위원과 투표를 하지 않은 시청자들 자신이 먹게 된다. 더이상 장난을 칠 수 없는 상황에서, '진짜 악마'가 된 제작진과, 남은 출연자들은 과연 어떤 쇼를 보여 줄까? 탑 4까지는 딱히 긴장감이 없을 오디션 프로그램을 마음 편히 바라보는 것도, 어쩐지 재미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