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대종사, 一代宗師, The Grandmaster
영춘권의 '일대종사', 즉 위대한 스승이자 이소룡이 쿵푸를 사사한 인물인 엽문은 견자단이나 황추생이 이미 연기한 바 있었다. 수많은 멜로드라마에서 부드럽고 강렬한 눈빛연기를 보여 주었던 양조위와 홍콩 느와르의 대부 왕가위가 만나 중국 무협계의 일대종사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상당히 기대되는, 이색적 시도로 여겨졌다. 게다가 한국 배우인 송혜교가 엽문의 아내로 출연한다는 소식 역시 국내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고, 다양한 무협영화 필모그래피를 갖고 있는 대배우 장쯔이의 출연까지 더해져 <일대종사>는 하반기 최고의 화제작이었다. 하지만 그 시도만이 빛났을 뿐, 개봉된 스크린 위의 영화는 아쉬움을 많이 남겼다.
영화의 시작부터 몰아치는 액션에서는, '왕가위적이다'라는 느낌을 받았지만 '과연 왕가위다'라는 찬사까지는 나오지 않는다. 무협영화의 액션신 치고 느린 호흡과 내리치는 빗줄기 속의 순간순간을 붙잡는 연출은 확실히 왕가위다운 감각이고, 시도였다. 하지만 그 느린 호흡이 과하게 지속되는 탓에 초반부터 약간 기를 빨리고 들어가는 기분이다. '왕가위적' 연출은 영화의 모든 곳에 지문처럼 묻어 있는데, 인물들의 얼굴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잡아 미세한 표정의 변화로 내러티브의 진행을 돕는 부분이라든가 1인칭 주인공 시점의 내레이션이 자전적 목소리로 극을 설명하는 설정들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러한 '왕가위적' 연출이 여태껏 엽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들이 보여주던 액션에의 쾌감을 반감시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왕가위가 만든 <열혈남아>의 느와르 액션이나 <동사서독>의 고전적 무협이 <일대종사>에서는 '최소화'된 듯하다. 그렇다고 엽문이라는 호걸의 사적인 드라마를 잘 짚어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영화의 말미로 가면 몇 줄의 자막과 내레이션으로 '퉁친다'는 느낌이 짙다. 엽문(양조위 분)의 주변인물, 궁이(장쯔이 분)나 일선천(장첸 분) 마저도 효과적으로 주인공을 받쳐주지 못하는 데다가 스스로의 존재감을 빛내지도 못하고 있다. 편집을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장면 간의 골이 깊어서 내러티브가 파편화되는 경향도 보인다. 미장센의 미학을 중시하는 감독이라 그랬다기엔 전작들에서 오는 기대가 너무 컸다. <일대종사>는 엽문도, 양조위도, 장쯔이도 아닌 그저 왕가위였던 영화다. 장면을 아름답게 연출하는 그만의 능력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왕가위의 다른 영화들보다도, 유독 '그뿐인' 영화라 드는 실망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궁가 64수의 마지막 수는, 돌아보는 것이었다. <일대종사>의 끝에서 궁이는 돌아 보았고, 엽문은 앞만 보았다. 그들의 돌아봄과 앞을 봄은 정답이 아닌 결과까지 딛는 과정의 걸음이다. 쿵푸의 결과는, 수평과 수직으로만 말하는 것이기에.
post script. 이 영화의 최고 명장면은 마지막 엽문과 독대하는 궁이의 클로즈업된 얼굴이었다. 졸다가 눈물 흘릴 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