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도의 비애
싸이월드가 한창 유행할 때였다. 많은 유저들의 ☞ETC☜ 폴더 한켠을 차지하고 있던, 글을 포함한 사진이 있었더랬다. 대부분의 고등학생들이 자의든 타의든 문과 혹은 이과로 가서 공부에 매진하는 길을 택했을 때, 비교적 소수였던 예체능 학생들이 본인들에게 쏟아지는 편견 비슷한 것을 변호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이었을게다. 미술이나 음악, 체육을 하면서 손에 물집이 잡히고 목탄이며 물감을 옷에 묻히고 숨이 딸려 몸은 고단하고.. 우리는 예체능을 잘하는 것이지 공부에는 재능이 없는데 사람들은 공부 못한다고 우리를 무시하고.. 그들의 신세에 공감할지라도 공부밖에 할 줄 모르는 나는 다소 벙찔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열 몇개의 과목을 평균 이상은 해야 원하는 대학에 가는데..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 간대매? 이해찬이 잘못했네..
그렇지만 정말 별수없이 공부를 선택했던 문이과 학생들의 고충에 대해서는 누구도 그런 종류의 자료를 만들지 않더라. 그 레드오션에서 허우적대면서도 자신이 결국 개천에서 난 용이 되고 말거란 자신감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남들 다하는 공부라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으로 여기게 된건지 몰라도 그때의 나에겐, 우리에겐 공부하는 삶이란 차라리 관성적이었다. 대학에 가고 나서, 갑작스럽게 이과생들에게까지 예체능류의 특수성이 부여되며 인문학도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이과생들은 그들만이 아는 공식을 읊지만, 문과생들의 대화란 애초에 인간생활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를 바탕으로 하기에 '그들만의' 것이 되기 어려웠다. 게다가 요즘의 대학에서 인문학도들이 하는 학문의 깊이란 것도 사회의 부품이 되기 위한, 알만한 정도로만 깊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비전문적이고 쓸모없는 학문을 공부한다는 편견에 시달릴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설사 학부시절의 인문학이 고만고만한 깊이에서 이루어진다 한들, 인문학도로서 이러한 평가야말로 얼탱이가 없는 것이다. 뭐 이렇게까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본인이 인문학도들만큼 언어를 전문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인문학도들이 직접 창조해내거나 책을 보고, 영화를 보고 써내려가는 텍스트들에서 본인의 것과 질적 차이를 찾지 못하거나, 아예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물론 시대가 시대니만큼 함량미달의 인문학도들이 문외한보다 못한 결과물들을 내놓는다지만 그때문에 이루어지는 저평가는 확실히 억울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인문학도가 언어를 다룬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하지만 인문학도들은, 이과도 할 수 있고 예체능도 할 수 있는 언어를 쓰려고 인문학을 공부한 것이 아니다. 읽을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쓸 수 있는 수준의 언어를 다루는 것이 인문학이라면 그야말로 공부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세상을 깊게 읽어내고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 적절한 상황에 배치하는 감각이 여타 분과를 공부하는 학생들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인문학도인 것이다. 언어가 만인의 것이라고 해서 모든 언어가 같은 취급을 받는다면 인용규칙이나 저작권 따위가 존재할 이유는 없다. 그렇게 따지면 소설가의 소설 속 한 줄 대사 역시 주인이 없는 것 아닌가?
나는 누구나 글을 쓰는 시대에 산다. 인문학도라고 해서, 인문학도가 아닌 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가치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각 분과별로 날카로운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그들에게서 순수하게 부러움을 느끼기까지 한다. 다만 내가 표현해내는 문장들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거나, 허락없이 내가 아닌 타인의 입에서 나온 것처럼 회자되는 것은 견딜 수 없다. 누구나 글을 쓰기 때문에,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들이 별것 아니게 돼 버린 세상을 개탄한다!! 인문학도들의 입지를 보장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