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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최고급잉여 2012. 6. 29. 14:50

4월 28일 오후 3:34 모바일에서

은교


나무처럼 볼품없이 갈라져 버린 뒤꿈치가 슬픈가? 한 줌도 되지 않는 하얗고 매끈한 뒤꿈치가 슬픈가? 연필은 뭉툭해서 슬픈가 뾰족해서 슬픈가? 그도 아니라면 뒤꿈치와 연필을 깎는 칼이 슬픈걸까?


은교를 두 번 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는 화면가득 넘쳐흐르는 애정의 바다만을 보았다. 사실 나름대로 영화를 많이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은교‘만큼 무형의 애정을 유형으로 바꿔낸 영화는 기억나지 않는다. 며칠을 생각해보아도 ‘넘쳐흐른다‘는 표현 밖에는 쓸 길이 없었다. 이적요가 원고지로 옮기고 오래된 반닫이에 가둬둔 ‘가장 아름답고 진솔하고 충만한‘ 고백은 그의 말대로 다시 쓸 수 없을 것 같다. 그 고백을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는 나 역시도 그런 고백을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 넘치는 사랑을 받고 싶다거나, 그들의 사랑이 불쌍하다거나 하는 모종의 가치판단 같은걸 하고자 하는게 아니다. 별은 아름다울 것도 없고 추할 것도 없는 그냥 별이지만 누구의 가슴에 맺히냐에 따라 그 빛을 달리하지 않던가. 나는 서지우가 10년에 걸려 깨달은 그 진실을 이 영화를 보며 학습한 것이다. 사랑의 모양을 모두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불러도, 그 사이에 이승과 저승만큼의 차이가 있음을.


서지우는 이적요의 또다른 페르소나로 은교를 이적요와 차단하려 하지만 동시에 은교와의 섹슈얼한 긴장감을 보여준다. 서지우가 처음 자신이 없는 집에서 자연스러운 은교를 봤을때 이적요를 붙잡고 ‘쟤 고등학생이다‘라고 했던건 이적요가 그의 다른 모습을 빌어 스스로를 책망하는 말이었다. 그는 이적요가 상상에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심리적 긴장감과 육체적 긴장감을 가시화시키는 역할을 분명히 해낸 것이다. 끊임없이 이적요의 애정과 인정을 구걸하는 서지우의 모습은 온전히 이적요가 스스로에게 휘두르는 잣대의 모습을 표현했다. 그래서 서지우와 이적요의 충돌은 이적요가 품은 내적갈등의 모습과도 같았다. ‘은교‘와 ‘심장‘을 비교하는 그 둘의 다툼에서는 은교에 대한 사랑이 더욱 분명해지는 느낌이었다. 결국 이적요는 가면을 깨뜨림으로서 모든 것을 끝맺고자 했을 것이다. 자신이 은교에 넝쿨처럼 얽어놓은 감정의 실타래들을 완벽히 끊어놓기 위해서. 


은교 역시 자신을 향한 열렬한 고백의 주인공이 이적요였음을 설핏 눈치챘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넘쳐흐르는 고백의 말들은 볼 수는 있어도 만질수는 없었다. 그래서 은교의 껍데기와 이적요의 껍데기는 서로의 온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박해일이 망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인 연기는 확실히 무리수였다. 하지만 눈내리는 날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은교와 마주 섰을때의 그 표정과 힘없이 내려가던 걸쇠만으로도 박해일의 모든 삽질이 용서되었다.


아쉬웠던 것은 시종일관 은교의 흰 살갗과 오목한 허리, 깨끗한 발꿈치와 가랑이 같은 것들을 계속 응시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분명 그러한 응시나 몇번의 정사신, 거기에 수반되는 음모 노출은 필요한 부분이지만 초반의 몇몇 씬들이 불필요하게 느껴질 정도로 거북했던 것은 은교를 응시한 후 따라오는 행동들이었다. 당황해서 눈을 돌린다거나 침을 삼키고 물건을 놓치는 등의 장면만 뺐어도 좋았을 것이란 말이다. 섹슈얼한 응시에도 흐름이 필요했는데, 은교 안에서의 그러한 응시들은 애정의 깊이가 변화해도 한결같이 욕정과 탐미의 훔쳐봄이었다.


마지막 장면이 너무 슬퍼서 불이 켜질때까지 일어나지도 못하고 통곡했던 이유는 그들의 이별때문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던 은교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던 이적요를 둘다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예뻐해줘서 고맙다‘는 말이, 이토록 슬프게 박힐 줄은 몰랐다. 그래서, 뒤꿈치도 연필도 칼도 모두 슬펐다.



** 그리고 ‘은교‘같은 고백도 넘 황공하옵지만 역시 나한테는 마광수로 고백하도록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