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카마츠 코지
사실, 영화가 본격적으로 내 취미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은 스무살을 전후해서가 맞다. 한번 흥미를 들이고 나니 영화에 관심 없이 지내 온 이십 년을 벌충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다. 성정 자체가 관심을 둔 것이라면 모르는 것 없이 섭렵해야 하는 나로서는, 내게 '영화'라는 분야에서 미지의 영역을 아예 제거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다. 나보다 먼저 영화에 손을 댄 다른 영화덕후들에게 뒤쳐지는 것도. 그래서 나는, 어쩌면 계속해서 영화와 싸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먼저 건 싸움이었기에 꼭 이기고 싶었지만, 애초에 이길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지나온 것들을 마스터하면 새로운 것들이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세계 도처에서 산불이 번지듯 생성된다. 그 속도를 인력으로는 도저히 따라잡기 힘들다는 것을 겨우 인정하게 됐지만, 영화 보는 것을 때려 치우지는 못했다. 그래도 손을 뻗었을 때 닿는 정도의 것들은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자, 라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영화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택했던 것이 글쓰기였다. 영화를 보고 나면 금세 휘발되어 버릴 기억력의 한계가 어느 정도는 극복되었고, 추상적인 감상들은 가시화된 결과물의 형태로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렇게 쓰여진 글들의 질이 어떻든 거기서 얻는 성취감 역시 상당했다.
대학에 와서 관련 수업을 듣기 전까지 나는 68혁명의 존재를 몰랐었다. 미지의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관심사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했던 여느 화두들과 달리, 68은 내 사고의 저변을 크게 바꿔 놓았던 사건이었다. 이전의 모든 것과 단절을 꾀하며 새로움에 대한 에너지를 분출시켰던 68의 시작은 사실 별 생각없이 일상을 흘려보내던 나에게 처음 '왜'라는 의문을 품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 혁명의 과정이나 성공여부와는 관계없이, 나처럼 기계적인 삶을 살던 반세기 전의 사람들이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던 그 시도 자체로도 고요한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같은 충격과 파문을 동시에 남겼었던 것이다. 68을 배우던 수업 중 틀어 주었던 'Imagine'이, 이전까지와는 달리 울컥하는 느낌을 주었을 정도로 나는 그 혁명에 굉장히 경도되었다. 그래서 정말 갑작스럽게 쓰게 된 논문의 주제를 고를 때도 고민없이, 그렇지만 막연히 68을 선택했다. 그리고, 68을 주제로 논문을 쓴다면 영화라는 프리즘을 통해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연결점을 정하고 나서 68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나가다 보니, 진보를 지향하고 나선 혁명에서 목적을 관철시킬 수단으로 폭력이 사용됐다는 아이러니를 발견하게 됐다. 68혁명의 열기가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하던 70년대에 독일에서는 RAF, 이탈리아에서는 붉은 여단, 일본에서는 적군이라는 이름으로 지하에서 각종 테러를 자행하던 무장투쟁조직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렇게 논점을 분명히 하고 나니, 일본 전공투 세대의 맏형급이자 최전선에서 활동했던 와카마츠 코지 감독의 영화들을 보지 않고 넘어갈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와카마츠 코지와 처음 만나게 되었다.
와카마츠 코지 감독이 얼마 전 교통사고로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비록 완성된 것은 아닐지라도 현재 내 사고체계의 적지 않은 부분을 구성해 준 이 일련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68혁명 자체가 한국에서는 생소한 사건이었고, 그 중심에서 영화로 투쟁하던 와카마츠 감독 역시도 '핑크 영화 감독'으로만 알려진 터라 대중적 인지도가 낮았기에 봐야 할 영화의 자막은 고사하고 영화조차도 구하기가 몹시 어려웠었다. 그가 만들어온 핑크 영화, 혹은 로망 포르노 장르의 저변에 깔려있는 혁명적 성인식같은 것은, 68이 없었던 한국에서는 그저 살색의 향연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짙었다. 아무튼 그렇게 몇날 며칠을 고생해 <벽 속의 비사>, <태아가 밀렵될 때>, <천사의 황홀>을 손에 넣었다. 논문 발표를 했던 해가 68혁명이 40주년을 맞는 해여서인지, 와카마츠 코지 감독은 2008년 <실록 연합적군>을 내놓았고, 독일에서도 RAF 리더의 생애를 그린 <바더-마인호프>가 개봉했었으나 아예 구경도 해 볼 수 없었다. 둘 중 <바더-마인호프>는 국내 개봉을 했었지만, 이미 논문 발표는 끝난 후.. 그걸 보러 지금은 없어진 동숭동 하이퍼텍 나다로 가는 길은 어쩐지 묘한 짜증이 났었다.. 아무튼 주어진 영화들은 짧은 영어 실력과 일본어 실력을 쥐어 짜가며 영상 텍스트를 수십번 반복해 분석하고 대사를 받아 적었다. 흰 바탕에 떠 있던 커서들이 분주히 기호로 변하며 페이지를 메워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차라리 쾌감이었다. 논문을 다 쓴 후 발표를 하던 날 단상 위에서 내려다 본 꽉 찬 청중석과 그 때 들었던 칭찬과 질문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후련함과, 학부 논문이기는 해도 한국에서는 와카마츠 코지를 처음으로 다뤘다는 자부심, 그리고 혹여라도 감독이 내 졸고의 존재를 알까 싶은 기대감과 부끄러움이 혼재했다. 지금은 다시 읽어볼 엄두도 안 날 정도지만.. 솔직한 말로 졸업앨범의 내 사진만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회수하고픈 그 감정과 같달까..
그가 감독하지는 않았지만 제작에 참여한, 야마토야 아츠시 감독의 <황야의 다치와이프>는 내가 본 핑크 영화 최고의 수작이다. 웨스턴을 일본식으로 풀어 내고 핑크 영화의 특징과 절묘하게 버무려 놓은 이 영화는 여느 핑크 영화보다 스타일리시한 데카당스가 느껴진다. 와카마츠 코지를 떠올릴 때면 축축하고 질척한 특유의 느낌 대신에 먼지 냄새가 날 것 같이 건조하고 하드-보일드한 영상이 단연 돋보이는 이 영화의 장면장면이 함께 떠오를 뿐만 아니라 관람했던 날의 씨너스 이수와, 뒷쪽 구석의 좌석에 몸을 푹 묻고 보던 내 모습까지 그대로 하나의 영상이 된다. 이렇게 와카마츠 코지라는 감독은 나와 일면식도 없으면서 내 삶 속의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렇게, 와카마츠 코지의 안타까운 사망 소식을 들으면서 나는 그를 추억한다. 아니, 그를 추억한다기 보다는 그와 맞닿아 있는 나의 이야기들을 다시 그려 본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큐브릭은 내게 말콤 맥도웰을 소개했고, 또 그렇게 알게 된 말콤 맥도웰은 내게 린지 앤더슨을 소개한다. 그러한 일련의 연쇄적인 인식 과정이 그대로 내 삶에 녹아들어 그것들을 고유의 이야기로 만들듯이, 68이 내게 소개한 감독 와카마츠 코지 역시도 자신이 만든 이야기로 내게 많은 것을 보여 주고 들려 주면서 나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도록 해 주고 있었다. 나 이외의 와카마츠 코지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도, 그가 녹아있는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을 것이다. 와카마츠 코지는, 그렇게 이야기를 만들다 스스로 이야기가 되어 버린 감독이었다. 누군가의 삶과 화학반응을 일으켜 새로운 상상력이 창조되고 전혀 새로운 유일무이의 이야기가 탄생되는 것, 낯간지럽지만 그것을 68정신의 하나로 봐도 좋지 않을까. 그의 사망이라는, 한 이야기의 끝이자 시작을 바라보면서, 나도 끝내는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로 화(化)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