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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병

최고급잉여 2013. 2. 1. 22:26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부들부들 몸이 떨리도록 추운 날씨가 한풀 꺾이고, 며칠 전부터 공기에 기분 좋은 습한 내음이 섞여들더니 그예 비가 내린다. 지난 늦봄께 쇼팽을 들으며 산책을 할 때 몸을 부드럽게 감싸던 그 촉촉함이다. 얼마 전부터 이렇게 공기중에 따뜻한 습도가 감돌 때면, 나는 이천구년의 오월과 작년의 오월을 떠올린다. 가장 즐거웠고, 가장 행복했고, 가장 죄스러웠고, 가장 슬펐으며, 가장 찬란했지만 가장 초라했던, 내 기억 속 가장 분명한 그 때. 익숙한 장소, 그 날 아이팟에서 나오던 노래에도 어김없이 떠오르는 그 오월들은 특히 요즘 공기의 컨디션에 민감하게 반응하곤 한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지, 너를 좋아하는 나를 좋아하는지 분간이 가지 않던 때였다. 지금도 간혹 헷갈리기는 하다. 이 감정에 기대지 않고는 지금을 버텨낼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꾸역꾸역 너를 붙잡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지난 것은 분명 너를 좋아하는 나의 뜨거움이 좋았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렇게 믿고 싶다. 가끔 너를 보아도 그저 '너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면 나는 정신없이 힘들어진다. 만일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그래서는 안되는게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마음이 드는 탓이다. 너를 본 지 얼마 되지 않던 오월의 그날은 예고도 없이 떨어지던 빗방울도 서럽지 않을만큼 감동적이었는데 요즘은 이런저런 생각에 때아닌 한겨울에 찾아와 준 오월의 습기가 반갑지만은 않다.


그래, 이건 차라리 병이라 부름이 맞다. 나와 네가 지금 이대로인 채라면, 오월병은 그저 병으로 남을 것이다. 아무 확신도 없어 잡념만 많아진 이대로라면, 그날의 공기는 더욱 나를 무너뜨릴 것이다. 그런 몸의 반응을 병이 아닌 기분좋은 기억의 되새김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외려 네가 아니라 나다. 그때의 설렘이 이어져 아무렇지도 않은 상태가 됐을 때 이 불치의 오월병이 사라질 것만 같다. 그렇게 믿고, 믿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post script. 가끔은 내가 너의 정거장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현실적인 생각이 들면서도, 그뿐이어도 좋겠다는 마음이다. 그래도 그냥 보통의 정거장보다는 네가 출발하는 시발점 혹은 네가 더이상은 다른 정거장으로 가지 않는 장소, 종착역이 됐으면 좋겠다. 더 바란다면 그날의 마지막 운행을 마친 차량이 종착역마저 지나 고단한 여정을 진짜로 마무리하는 차고지가 됐으면 한다. 그러나 내가 무엇이 됐든, 그 이후의 결말은 너무나도 활짝 열려 있다. 그리고 그렇기에 끝을 행복하게 닫을 수 있는 경우의 수 역시 존재하겠지. 하지만 또 그 확률은 그렇게 되지 않을 확률만큼 잘개 쪼개어진 하나의 조각이 된다. 그래도, 아주 작은 확률이라도 내게 일어난다면 그것은 백프로다.


나는 그래서 또, 우리의 시계가 남들과는 다르게 가기를 바란다. 필요할 만큼 속도를 조절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우리의 시간만큼은. 내가 몇살이고 네가 몇살인 것처럼 시간은 절대적이지만, 또 상대적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리의 시계만 그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