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소녀들, Beyond the Hills
인간은 '믿는 구석'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동물이다. 그 믿음의 벡터가 스스로가 개척하는 밝은 미래로 향하든, 절대자를 통한 구원을 향하든지간에 삶이라는 것의 허무함을 견디기 위해 붙잡고 살 신념이 인간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기에 그 신념의 모양이 어떻든 남이 믿고 사는 대상과 방식을 비웃거나 손가락질하는 것은 제 얼굴에 침뱉기나 마찬가지다. 저마다의 신념은 이처럼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며, 타인으로부터 그의 것을 강요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그리고, 자신의 것을 남에게 강요해서도 안된다. 하지만 신념이 맹신으로 그 모습을 바꿀 때, 그것은 주변인들에게 강력한 강제성의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신념 역시 인간이 만든 것이기에 무결할 수 없는데도, 맹신의 늪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것만을 절대 진리로 여기기 때문이다. 특히 종교는 이성이나 논리로 해답을 찾을 수 없으며, 오로지 신념만이 지배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종교를 믿기로 한 사람들이 그것에 근거하여 하는 말과 행동들을 비종교인들에게까지 이해시키기는 힘들다. 하지만 현대의 인간사회란 것이 워낙 복잡한 탓에 같은 신념을 가진 사람끼리만 모여 살 수도 없고, 한 인간 안을 하나의 신념만이 채우고 있으란 법도 없다. 그렇기에 서로 이해는 안 될 지언정 인정은 하고 지나갈 부분은 지나가는 것이 속편할텐데, 일부 종교의 세계는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일반적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운 자신들의 논리을 이용해 포섭을 시도하는 경향을 보인다. <신의 소녀들>은 이처럼 믿음으로만 빚어진 종교의 논리로만 돌아가는 공간,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신념의 참극이다.
이 영화 속 종교인들이 모시는 신의 모습은 인간의 것과 같다. 외양만 인간과 같을 뿐 아니라, 신이 세상과 그의 신도들에게 하는 행동 역시 사랑이나 질투같은 인간의 감정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신의 모습은 주인공인 알리타를 포함한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간에게 투영된다. 알리타는 보이치타에 대한 맹목적이고 강렬한 사랑을 품고 있다. 그녀는 보이치타와 함께 고아원에 있을 시절 나누었던 사랑을 그리워하며 그것이 아직 건재함을 확인하고자 한다. 영화 속에서 직접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았지만 고아원을 나와 독일과 수도원이라는 공간으로 흩어지게 되며 그녀들은 어떻게든 믿고 기댈 구석을 찾으려 애쓴다. 알리타는 그것이 보이치타라고 생각했고, 보이치타는 그것을 신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나 보이치타의 신을 믿는 방식이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영화가 시작되고 알리타와 그녀를 마중나온 보이치타가 격하게 포옹하는 뒤로 기차가 지나가며 세상과 그녀들을 단절시키고, 그렇게 알리타와 보이치타의 수도원 생활이 시작된다. 알리타는 수도원 안에서 '질투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며 짜증을 돋우는 진상을 부린다. 이러한 알리타의 행동은 수도원에서 고해성사를 강요당하면서부터였는데, 어떻게 보아도 죄가 아닌 것들을 죄로 인정하고 고백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알리타는 이 수도원과 신의 존재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보이치타로 하여금 그것을 믿게 만든 수도사와 수녀들을 증오하게 된다. 보이치타도 고아원 시절 알리타로부터 받았던, 오롯이 그녀만을 향한 사랑-그것은 신의 사랑과도 흡사한 모양이었다-에 대해서 인정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새언덕수도원에서는 결코 인정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 이외의 신을 섬기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는 알리타는 마치 어린 아이처럼 수도원 식구들에게 행패를 부린다. 사사건건 알리타와 부딪쳐야만 했던 수도원 식구들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그들이 지켜오던 십계를 하나하나 깨뜨리는 모습을 보인다. 알리타의 재물을 탐내고, 성상과 성화에 집착하며, 알리타에게 불리한 거짓증언들을 늘어 놓고,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는 새언덕수도원의 모순은 결국 그들이 믿던 것이 신이나 그의 말씀이 아니라 신을 믿는 그들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십자가에 매달려 고문당하는 알리타의 모습이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다 박해당한 예수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결국 수도원 사람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알리타의 죽음은 너무나도 무미건조하게 표현되는데,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부조리한 사회의 폭력과 낙태를 선택할 수 밖에 없던 개인의 이야기를 담은 <4개월, 3주 그리고 2일>에서도 유사한 느낌의 연출이 있었다. 신을 선택한 탓에 바깥과 단절되어 살아가는 듯한 수도원 사람들 역시도 결코 현실과 완벽히 유리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며, 그들이 어떤 참극을 저지르고 있든간에 수도원 바깥은 그들과 상관없이 돌아간다. 코엔 형제의 영화 속에서도 많이 보이는, 이와 같은 건조함과 무심함은, 이제는 이미 너무 많은 영화에서 사용된 연출 방식이기에 더이상 충격적인 느낌을 줄 수는 없었다.
결국, 인간이 지배하는 세상이든 신이 지배하는 세상이든 그 안에서의 삶은 피로하고, 종국에는 허무해진다. 이 영화 속에서는 그 피로와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낸 믿음들이 맹신이 되어 오히려 인간의 어깨를 더 무겁게 만드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담겨 있다. 새언덕수도원의 수도사는 알리타를 따라 잠시 수도원 바깥에 다녀오겠다는 보이치타에게 '한 번 떠난 것은 변하기 마련'이라 말한다. 인간의 믿음이란 것이 그만큼 연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맹신을 요구하니, 탈이 날 수 밖에. 자비에 보부와의 <신과 인간> 속 수도사들이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라는 질문의 답을 신에게 갈구했다면, <신의 소녀들>에서는 그 질문을 인간에게 던지고 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수도원 사람들과 보이치타를 싣고 검찰로 가던 경찰차가 눈길에 바퀴가 빠져 멈추듯이, 자동차 앞 유리에 더러워진 눈이 튀어 앞이 보이지 않듯이, 결국 그 해답은 누구에게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대신에 사람들은 삶 속에서 나름의 답을 찾아 간다. 그것이 정답인지 아닌지 역시 누구도 모르지만, 인간은 그 길을 믿고 걸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