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술, 술
지갑에서 빠져나가는 돈 중 가장 아까운 것은 술값과 택시비다. 원래는 약값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요즘은 안티에이징에 힘쓰고 있는 관계로 약값이나 병원비는 아깝지 않게 됐다. 택시비 같은 경우는, 내게 택시의 필요성이 느껴지는 때라곤 모든 대중교통이 끊기고 걸어다니기도 무서운 새벽녘 뿐이기 때문에, 그 시간을 피하면 충분히 아껴질 돈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그 아까움의 원인이다. 술은, 특히 요즘들어 그것이 인간의 삶에서 필요한 이유를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 들어가는 돈이 무척 아깝다. 고작 잠깐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을 받기 위해서, 혹은 이성을 잃기 위해서 그 쓰고 맛없는 것을 먹어야 한단 말인가? 진지한 얘기를 하기 위해선 앞에 술잔을 늘어 놓아야만 하는 한국 특유의 비논리도 이해가 안 된다. 어느 정도 마비된 이성에 의탁해서 하는 '진지한 이야기'가 진정성을 갖고 있는 것인가? 술마신 다음날, 술을 마시며 나누었던 이야기에 추궁을 당한다 해도 취한 상태였다는 변명에 무마될 말들에 진정성이란게 존재할리 있단 말인가? 술은 마치 카톡이나 문자같은 매체다. 진심은 매체를 건너오며 분명히 그 농도가 희석된다.
술자리를 별로 즐기지 않는 이유는 우선 그 음료의 맛이 내 취향과 상당히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칵테일, 칵테일 소주, 예거나 막걸리 정도는 그냥저냥 넘길 수 있다 쳐도 그 외의 주류는 긴 말 필요없이, 싫다. 그래도 한동안은 술자리에 나갈 기회가 생길 때면 남들 먹는 만큼은 마셔봤다. 그러면 백이면 백, 취해서 정신을 못차리는 동무들이 생긴다. 그걸 눈앞에서 보고 있노라면 진심 오만 정이 다 떨어진다. 이런 때에는 정신을 놓을 틈도 없을 뿐더러, 정신을 놓는 상황에 처하는 것도 싫어진다. 한때는 내가 술에 지고 난 다음의 모습이 너무 궁금해서 술을 들이부어본 적도 있었지만 잠을 잘 지언정 끝내 정신을 놓지는 못했다. 다만 어디 춤을 추러 간대도, 유흥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술을 굳이 마시지 않아도 정신없이 노는데 별 지장이 없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론, 내게는 술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술을 마시지 않으면 사회성마저 의심받는, '술 권하는 사회' 그 자체다. '먹다보면 술도 는다' '술은 인생의 맛이다' 따위의 말들을 주워 섬기는 술빠들이 산재한다. 그 맛을 알고 싶지도 않을 뿐더러, 그 맛이 애초에 느껴질 미각이 내게 존재했다면 내가 왜 굳이 술을 안 마시겠는가? 마치 애 낳기가 무섭고 준비도 안 됐다 느껴, 장래의 출산을 진심으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에게 '낳아보면 다르다'라며 모성본능을 강요하는 자들과도 같지 않은가? 낳고 나서 다르지 않으면, 그놈의 모성본능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때는 책임을 질 요량인가 싶은 그 느낌. 그놈의 '내가 해 봐서 아는데', '해보면 다를 것이다' 논리. 개신교 병자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전도할 때, '교회는 안 나간다'라는 거절의 말에 '그래도 한 번 와 보라', '와 보면 다르다'라며 사람들을 들들 볶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래도 한 번 갈 수 있다면 내가 왜 그들의 들들볶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안 나가겠는가? 이 사회에 팽배한 이딴 식의 경험주의와 그 강요가 '아프니까 청춘이다' 류의 망언을 탄생시킨 것이 아닌가? 술빠들이 나처럼 술을 안 마시는 사람들에게 갖는 그 모종의 우월감이 참 어이가 없다. 내가 저만 못해서 술을 안 마시는 줄로 알고..
그래서, 나는 앞으로의 삶에 닥치는 각종 권주행위들을 과감히 뿌리쳐 보려고 한다. 직장을 얻고 나면 더 힘들어지고 분명 타협도 할테지만, 그래도 당장은 굳이 할 필요 없는 일에 정력을 쏟고 싶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