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사람이 사람과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그것이 비록 자신이 미치도록 하고 싶고 하지 않고는 못배길 그런 일이라 할 지라도, 세상의 법도와 어긋날 때에는 '사과'라는 것을 하고 그에 맞는 '벌'을 받아야 한다. 그것의 정당성이 개인의 입장에서는 결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라 하더라도,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법과 도덕이 존재하는 곳에 살지 않는 것이 아니라면 이 사실은 누구에게나 '비슷한' 정도로 적용된다. 그런데 사람이란 영악해서, 모종의 죄사함을 받고자 하거나, 적어도 마음에 무겁게 얹혀지는 죄책감 같은 것들을 덜기 위해 면죄부나 종교 따위를 만들어 냈다. 인간의 죄를 임의로 '사하는' 가장 오래된 이데올로기인 종교의 근원, 신의 존재마저 흔들리는 오늘날에는 그런 초월적 존재보다 더 인간 세상에 가까운 면죄용 발명품들이 판을 친다. 이를테면 만취상태의 사람이나 정신질환자에게 주어지는 감형의 기회나 '마녀사냥'이라는 단어의 악용 정도가 되지 않을까.
몇 년 전 한 힙합가수의 미국 명문대 졸업여부를 놓고 꽤 큰 설전이 벌어졌었다. 인터넷 세상 뿐만이 아니라 오프라인마저 들썩거릴 정도였다. 그가 살아온 거짓된 삶을 지적하는 쪽의 증거는 넘쳐났고, 지적 당하는 쪽의 대처는 참기 힘들 정도로 빈약했다. 그렇게 그 힙합가수가 속수무책으로 공격당하던 중 이 사태에 '마녀사냥'이라는 말이 끼어 들었다. 그로부터 그 힙합가수는 네티즌들에게 '사냥당하는 마녀'가 되었다. 미국 명문대 수석 졸업에서 '수석'이란 말이 자취를 감추고 그가 바탕에 깔아 두었던 자잘한 허언들은 아예 차치된 채로, 그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이 되었다. 중세시대에 죄가 없는데 좀 거슬리는 한 명의 인간에게 다수의 인간들이 죄를 덮어 씌워 화형하던 어두운 역사가 낳은 단어가 수백년 후의 어느 날 이렇게도 사용이 되는구나, 싶었다. 이 사건 이후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잘못을 저지를 경우에 바로 사과하는 일 없이 '저를 마녀사냥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 그의 잘못을 탓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죄없는 마녀를 사냥하는 사냥꾼이라도 된 양 한풀 꺾여 고개를 숙였다.
물론, 예의 '대중의 뭇매'라는 것이 결코 정당하다는 것은 아니다.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속도와 강도는 지적당하는 사람의 피로와 스트레스는 비례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것이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일 수도 있다. 그런 폭력성까지 감수하라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스트레스를 덜 수 있는 현명한 대처로서라도 즉각적인 사과와 뉘우치는 모습은 사과를 미루면서까지 지켜야 할 당사자의 자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뭐 개인의 도덕성은 뒤로 하고라도 잘못한 일에 잘못했으니 반성한다는 시늉이라도 하라는 것이다. 이들은 종종 명백히 잘못을 저지른 경우에도 덮어놓고 자신을 ‘마녀사냥‘하지 말아달라 호소하곤 한다. 미안합니다라는 한마디가 어려워서, 상황 자체를 별일 아닌 것처럼 만들고 동시에 그 잘못이 집단의 광기에 있는 것처럼 적반하장으로 구는 것이다. 유난도 정도껏 하라는 그 뻔뻔한 액션이 가증스럽다.
아이돌 그룹 왕따 사건에서도, 한 베스트셀러 작가의 무단인용(?)으로 빚어진 촌극에서도 이와 같이, 간단한 사과 대신에 대충 무마하려는 움직임이나 책임 전가 등의 행위가 빈번하다. 무단인용(?)건을 상황에 모든 기름기 빼고 보자. 잘못과 책임은 백퍼센트 작가(와 출판사) 측에 있다. 그리고 그녀는 사과를 하고 합당한 조치를 취하면 그만이었을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연스럽게 그녀의 빠들이 등장해서, 무려 쌍차문제에까지 관심을 가져주신 작가님께 무슨 만행이냐며, 늬들 작가님 트위터 보고 공주병이라고 욕하더니 이번 기회에 마녀사냥하려는거지? 요딴 식으로 나와버리는거다. 왜 유난이세요? 제가 여태까지 그쪽 분들한테 얼마나 잘했는데 이런거 하나 눈감고 못넘어가요? 그래 씨발. 이건 차라리 생색이다. 그 공주님 본인은 도대체 잘못한 것도 없으신 듯하고. 이 사단의 본질인 무단인용(?)은 외려 큰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변해버렸다. 얼마전 야성미를 내세운 남자 아이돌 그룹의 외국인 멤버가 저지른 음주운전 사건에서도, 그가 술을 먹고 운전을 했다는 팩트 대신에 사고 직후에 여명 두 병을 사서 그걸 마셨는지 안마셨는지가 더 중요해져 버린 것처럼.
잘못을 인정하고 구차한 변명 없이 우선 사과하는 문화는 대체 왜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까. 적시에 사과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문제의 본질은 흐려지고 바깥에서 보면 그저 개싸움이 될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