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나이스, Mr. Nice
영화 속의 '미스터 나이스'는 영화 홍보문구만큼 짜릿하지도 않았고, 그는 모두가 원하거나 붙잡고 싶어할 만한 남자도 아니었다. '마약 밀매'라는 소재를 가지고 이렇게 지루한 이야기를 뽑아내기도 힘들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마약 밀매란 뉴스나 가공의 이야기만으로 접할 수 있는 금단의 영역인지라 사건이 주는 긴장감만도 상당할 것이지만 이 영화는 그런 기대를 무참히도 져버린다. 가까스로 실망감에서 헤어나와 변호를 해 보자면, 이 영화의 주요 골자는 '마약 밀매'가 아니라 마약 밀매상의 '삶'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마치 평범의 극치인 삶을 살아온 옆집 아저씨의 자서전을 보는 것 같은 필연적 지루함이 동반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은 한다. 하지만 그렇게 피의 쉴드를 쳐 본들 이 영화가 재미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43개의 가명, 89개의 전화번호.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퍼져있는 25개의 회사와 네트워크. FBI의 블랙리스트이자 CIA, 마피아, MI6 멤버들의 파트너! 20세기 모두가 원했던 그 이름, “미스터 나이스” 하워드 막스를 만나봅시다. 교사, 스파이, 작가, 대변인, 돈 세탁 전문가, 마약 감별사, 핵물리학자 등 천의 얼굴로 남부 웨일즈의 작은 광산마을을 시작으로 옥스퍼드를 거쳐 독일, 런던, 파키스탄, 태국, 마닐라를 지나 미국에 이르기까지, 짜릿한 희열로 가득한 인생을 걸어 온 그의 거짓말 같은 진짜 이야기가 지금 시작됩니다!
(내가 원래 영화 홍보 멘트를 인용하는 사람이 아닌데.. 오늘은 어쩔 수가 없네..)
언급했듯, 이 영화는 마약밀매상의 '삶'에 주안점을 둔 이야기인 탓에, 주인공인 하워드 막스(리스 이판 분)가 관객이 가득 찬 커다란 공연장의 무대에 오도카니 서서 자신의 삶을 쇼처럼 보여주는 것을 시작으로 하며, 이야기 속의 이야기 형식으로 진행된다. 평범하고 얌전했던 그의 유년시절부터 마약을 처음 접하게 됐던 순간, 교사가 되어 마약을 끊어야만 했던 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약 밀매상이 되겠다 마음먹었던 순간이 영화의 초반에 약 15분 정도로 압축되어 보여지는데 그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무미건조함과 압축 방식은 아직까지 납득가능한 수준이었다. 문제는 그 후에 펼쳐지는, 당연히 살벌하게 긴박해야 할 모든 사건들마저도 별다르지 않은 방법으로 연출된다는 것이다. '쿨하다'거나 '담담하다'는 수식이 붙을 정도는 이미 넘어섰다. 홍보 멘트 속의 '43개의 가명, 89개의 전화번호'나 그만큼 '미스터 나이스'가 사칭했을 수많은 가짜 직업들과 관련한 이야기들조차 이 영화에서 응당 가져야 할 지분을 배당받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주디(클로에 셰비니 분)와 하워드가 처음 만날 때, 그녀가 바둑의 '사면초가' 룰을 설명하자 그는 그것이 인생과 닮았다고 말한다. 이 영화는 삶 속에서 직면하는 사면초가의 상황을 그리되 그것의 절박함을 제거하는, 도통 의도를 알 수 없는 연출을 한다. 사면초가를 벗어나기 위해 배수진을 치는 치열함이 아니라, 그냥 바둑판에서 들어내지면 그뿐인, 거기에 다음 돌을 올리는 것으로 끝나는 허무함만이 존재했다.
<미스터 나이스>에서 굳이 볼만한 가치가 있는 부분을 고른다면, 그것은 온전히 영상미에서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주디와 하워드가 처음 섹스할 때의 색채 묘사는 충분히 감각적이었다. 질과 자궁의 붉은 내벽과 흰 정액의 끈적한 대비는 흔한 살색의 얽힘보다 에로틱한 충격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하워드가 길을 걸을 때마다, 거리에 그만을 콜라주해 붙여 놓은 듯한 비현실적 영상은 내내 마리화나를 입에 물고 있던 하워드의 정신 상태를 묘사하는 것 같기도 했다.